"뜨거운 맛 보셨습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 '우조교 사건' 실언에 여성계 반발

“신중하지 못한 발언으로 여성계와 국민 여러분께 실망과 걱정을 안겨드리고,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에게 이중의 상처와 고통을 준 점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취임 100여일을 맞은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25일 “죄송하다” “반성한다” “사과한다”는 말이 수차례 들어간 사과문을 발표하며 여성계에 머리를 숙였다. 정 총장은 또한 이 사과문에서 “앞으로 서울대는 성희롱 성폭력 문제의 예방과 해결을 위해 상담소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의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취임 후 서울대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으며 많은 지지를 받아온 정 총장이 이토록 여성계에 이례적일 정도로 정중한 사과문을 발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교수가 억울하게 매장된 사건”

다름아닌 정 총장이 여성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발언을 쏟아 냈던 것이다.

국내 최초의 직장내 성희롱 소송이었던 우 조교 사건은 6년간의 법적 공방 끝에 지난 1999년 6월 서울고법이 신 교수가 원고인 우씨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우 조교의 승리로 정리됐던 사건이다.

이에 대해 정 총장이 ‘우 조교 사건’은 신 교수가 억울하게 매장된 사건이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여성계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셈이었다.

여성단체들의 반발과 정 총장의 사과, 여성단체들의 재반발 등으로 이어지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칠 조짐까지 보였지만 정 총장의 뼈를 깎는 듯한 사과문으로 일단락 됐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정 총장 뿐 아니라 서울대가 학내 성희롱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일대 전환점이 만들어졌다는게 학내ㆍ외의 평가다.

문제의 발언이 터져 나온 것은 10월 23일 서울 프레스센터. 한명숙 여성부 장관이 서울대에 여 교수 채용 확대를 요구하기 위해 정 총장을 만난 자리였다. 대화 말미에 한 장관이 학내 성희롱 문제를 언급하며 우 조교 사건을 화제에 올리자 사단이 벌어졌다.

정 총장은 한 장관의 예상을 깨고, “제가 신교수랑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잘 아는데, 제가 소장(訴狀)을 같이 봐주고 했는데, (신 교수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은 문제예요”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정 총장은 이어 “어떤 것은 운동차원에서 당연히 해결돼야겠지만 당하는 사람은 아주 죽을 맛이고 매장당하는 것”이라며 “(우 조교는) 조교도 아니고 1년 계약의 조수인데, 계약이 해약되자 앙심을 품고 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장관이 이에 “상대방이 성희롱을 안 하면 문제가 안되죠”라며 반박하자 정 총장은 “그 사건은 과장됐고, 신 교수는 억울하다”고 신 교수를 계속 두둔했다.


여성단체 “시대착오적 망언”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을 통해 이런 대화 내용이 알려지자 여성단체들은 “시대착오적 망언”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정 총장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이튿날인 24일 오전 곧바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여성계에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며 진화에 나섰다. 정 총장은 “흉허물없이 털어놓은 얘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여성계와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정 총장은 “직장내 성희롱 문제가 본격 제기된 우 조교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며 “단지 개인적으로 잘 알던 교수와 가족들이 그 사건으로 어려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에서 얘기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사회정의 구현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개인의 실수로 그 사람의 업적과 일생이 사장되지 않아야 한다”는 등 여전히 신 교수를 두둔하는 정 총장의 발언은 곧바로 ‘가해자 온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며 여성단체들의 계속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 전화, 한국여성민우회 등 3개 단체는 24일 정 총장의 해명이 있은 후 성명서를 내고 “정 총장의 발언은 직장내 성희롱이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을 거스르는 망언”이라며 “비록 사과를 했지만, 성희롱을 예방해야 할 조직의 장으로서 성희롱에 대한 진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여성단체의 비판대로 정 총장이 일반적 수준의 남성들처럼 성희롱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정 총장은 24일 해명 기자간담회에서도 “성희롱이나 여성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갑자기 터져 나온 사태에 매우 당황한 모습이었다.

신 교수의 동료로서 신 교수가 잘못한 측면도 있지만 사건이 과장되게 알려졌고 신교수에게도 억울한 면이 있다는, 소박한 동정심에서 했던 말이 일대 파문을 일으키자 정 총장도 어쩔 줄 몰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폭력 문제에 전향적 자세 계기

하지만 정 총장은 여성단체의 성명서가 나오자 곧바로 이날 저녁 학내 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여 교수들과 대화를 나눴고, 다음날인 25일 여성단체 대표들과도 만났다. 이 과정에서 정 총장은 전화위복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 총장 본인 뿐 아니라 서울대가 성희롱 성폭력 문제를 더욱 진지하고 깊이있게 접근해 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다.

정 총장의 사과문은 이런 변화 속에서 나왔다. 정 총장은 사과문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저는 구체적인 성희롱 피해자들이 처하는 딜레마의 상황과 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음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여러분의 무거운 질정을 통해 얻은 이 값진 깨달음의 의미를 되새기겠다”고 밝혔다.

여성단체 관계자는 “정 총장의 발언이 많은 실망을 주었지만 이후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오는데서 나름대로의 신뢰를 얻었다”며 “앞으로 서울대의 변화를 지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용창 기자

입력시간 2002/11/01 17:49


송용창 hermeet@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