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만을 남긴 모스크바의 비극

체첸 인질범 강제진압, 독가스 사용 200여명 사상

역시 협상보다는 강공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월26일 모스크바의 돔 꿀뚜르이(문화의 집)에서 700여 관객의 생명을 볼모로 러시아군의 체첸 철수를 요구하던 인질범(러시아측은 테러리스트로 지칭)들을 강제 진압하는 초강수를 택했다. 그 결과 인질범 50여명을 포함해 모두 200여명 가까운 인명피해를 냈다.

전체의 30% 가까운 희생자를 낸 모스크바의 비극은 사흘째 계속된 협상이 무산되면서 예고됐다.

‘백학’ 가수로 유명한 요시프 코브존 국가두마(하원) 의원 등 의회 대표단과 외교사절 등은 러시아 당국과 인질범간에 협상의 물꼬를 트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으나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맞서 인질 몇 명을 석방시키는데 그쳤다.

인질범들은 러시아 당국의 강경 입장을 재확인한 뒤 ‘26일 오전 6시부터 인질 살해’라는 최후통첩을 전했고, 그 시한이 다가오면서 현장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 칠흑 같은 어둠속에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다시 내려 앉은 적막같은 고요. 그 틈새로 몇몇 그림자가 환영처럼 움직였다. 6시20분.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대테러 특수부대 ‘알파’ 요원들이 2층 창문과 우측 벽을 뚫고 돔 꿀뚜르이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내부는 이미 환풍구를 통해 불어넣은 가스로 자욱했고, 예기치 못한 공격에 인질범들은 자폭장치도, 방아쇠도 당기지 못했다. 7분여만에 위험인물 제거, 40분만에 진압작전 종료.


대 테러전쟁 명분, 협상 뒷전

작전은 싱거웠다. 또 쉬웠다, 그러나 희생은 예상외로 컸다. 인질범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독가스는 무고한 인질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인질범보다 더 많은 인질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500여명 가운데 120여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푸틴 대통령은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유족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 길밖에 없었을까? 지금껏 지구촌 곳곳에서 숱한 인질극이 벌어졌지만 협상다운 협상도 해보지 않은 채, 인질범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시늉도 해보지 않은 채, 수백명의 인질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대로 찾아보기도 전에 독가스를 품어넣고 진압에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인질극을 벌인 체첸 반군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증오가 극에 달해 있고 대테러 전쟁이라는 국제 기류 탓일게다.

입력시간 2002/11/0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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