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유쾌한 웃음 따먹기

일요일 저녁이면 ‘개그 콘서트’를 즐겨본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온갖 잡다한 지식을 초인적인 스피드로 늘어놓은 수다맨이나, 무나 파인애플을 이로 가는 차력사적인 묘기를 보여주는 갈갈이 삼형제, 맹구를 비롯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는 봉숭아 학당 등은 주말의 심란함을 떨쳐 버리게 하는 청량제이다.

또한 코미디는 카메라나 스튜디오에 종속되는 양식이 아니라, 무대와 같은 연극적인 공간 위에서 있어야 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문화적 의미가 각별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한때 성적인 소재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양상을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 최근에는 개그 컨서트 특유의 신선함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에는 개그 콘서트에서 신인 개그맨 이정수와 만나는 일을 무척이나 즐겁다. 그가 진행하는 코너 제목은 ‘우격다짐’이다. 굳은 얼굴 표정으로 하얀 코트를 입고 나와서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내가 누구게∼ 나 이정수야. 웃기지? 웃기잖아.” 사실 여기까지는 별로 안 웃긴다. 게다가 개그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번듯하게 생겼다. 한 사람이 하는 스탠딩 개그이고 신인 특유의 아마추어적인 냄새도 나는 지라 웃길지 못 웃길지 보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면 어눌한 목소리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개그를 화려하게 펼쳐놓는다.

“내 개그는 17대 1이지. 17명 중 1명만 웃어. 내 개그는 양파야 . 까도 까도 똑같아. 웃기지? 웃기지? 웃기잖아.”

“내 개그는 만화책이야. 재미없으면 그냥 넘어가. 웃기지, 웃기지? 웃기잖아. 지금 못 알아 들으면 나중에도 몰라. 웃기지?”

이정수의 개그는 명쾌하고 간결하다. 그는 자신의 개그를 스스로 규정하는 일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관객들의 관습적인 인식을 뒤집어 놓는 은유를 절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17 대 1’이라는 말은 영화 비트에서 임창정이 열일곱 명과 싸워서 이긴 적이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17 대 1’의 의미가 전복된다. 17명중에 1 명만 자신의 개그를 듣고 웃는다는 자기냉소의 차원이 곧바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한 자신의 개그를 만화책이라고 하면 관객은 뭔 소리인가 한다.

하지만 이정수는 만화책을 읽는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을 짧지만 예리하게 제시한다. 만화책을 읽을 때 재미없으면 그냥 넘어가듯이 자신의 개그도 그런 것이니 관객들도 그렇게 봐 달라고 말한다.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웃겨야 하는 자신의 상황과 웃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의 기대지평을 넘나들면서 순식간에 헤집어 놓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놀라운 언어감각이다. 그래서 일요일 저녁이면 은유의 달인 이정수를 만나는 일이 기다려진다.

미국의 철학자 테드 코언은 농담 따먹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웃음의 의미를 친교(親交)에서 찾는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그 어떤 느낌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에서 웃음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정수의 개그 ‘우격다짐’은 그 제목과는 달리 관객과 개그맨이 가지고 있는 상호이해의 지평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른 삶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가 동질적인 이해의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웃음은 그러한 상황에서 상호이해의 지평을 확인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같은 장면이나 사물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다. 그 경험은 공동체의 동질성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이 충족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우스개는 어떤가. 왠지 폴란드 인들이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전구 하나를 갈아끼우는 데 폴란드 인 몇 명이 필요할까? 답은 세 사람. 한 사람은 전구를 붙잡고 다른 두 사람을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사다리를 돌린다.”

웃기지? 웃기지? 웃기잖아. 안 웃기나 보네. 내 글이야 늘 그렇지, 뭐.

입력시간 2002/11/0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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