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정신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송웅달 회장

희망의 전도사로 사는 나머지 삶

“아들의 꿈이 이뤄진 셈이지요. 대중 가수가 아니라 가스펠 가수가 된 게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부자(父子)는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불의의 사고로 얻은 정신질환을 꿋꿋이 잘 극복해 낸 아들, 10여년 그 아들을 돌봐온 아버지는 이제 정신질환자 가족들 모두의 대부로 자리해있다.

가스펠 가수 송선국(33)씨의 아버지 송웅달(62)씨는 사단법인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 회장이자 올해 9월에 발족된 ‘정신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정사모)’의 대표다.

가족협회는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의 모임이지만, 정사모는 병력과 무관한 일반인들에게도 함께 열린 자리다. 정신병에 대한 사회의 굳은 편견의 벽을 허물고, 정신질환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을 나누고 있다.


정신병도 인간적인 질환중 하나

“정신병은 유전도 아니고, 특수한 병도 아닙니다. 단지 다른 질병보다 치료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뿐, 누구에게나 후천적으로 닥칠 수 있는 일반적인 질환의 한가지일 뿐입니다.” 드물게도, 장남 선국씨를 당당하게 세상과 만나게 하며 병바라지해 온 것도 송씨의 그같은 생각 때문이다. 으레 가족 중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가 있으면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부끄러운 비밀처럼 숨기는 것이 현실.

그만큼 이들을 대하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냉소가 가족들 스스로 얼어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족협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의 정신병 환자수는 약 130만명에 이른다. 가족까지 합치면 최소한 500만명이 넘는다. 개중엔 정신과의사는 물론 군장성, 장관, 심지어 전직 대통령의 가족도 포함돼 있을만큼 많은 이들에게 숨어있는 고통이다.

송씨는 “지난날 우박과 세찬 소나기를 맞을때는 이런 청명한 날이 오리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고 말한다. 14년전인 1988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의 장남 선국씨에게 벌어진 일은 지금도 악몽으로 남아있다.

현재 ‘하나님의 교회’ 목사이기도 한 송씨는 당시만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1978년부터 약 17년간 보험감독원에 근무, 교사인 아내와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어느 저녁, 학교를 파한 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어느 때와 사뭇 달랐다. 얼이 빠진 사람처럼 시선이 풀린 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밤새 잠도 자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날 학교에서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음악실에 가던 중, 실내화를 갈아신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선생님에게 매 30대를 맞고 실신한 뒤 나타난 증세였다.

시간이 갈수록 상태는 악화됐다. 낮밤을 바꿔 지내며 학교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아내가 직접 학교에 데려다놓아도 곧장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심상찮은 아들의 병이 ‘정신분열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대학병원을 거쳐, 늘 주변을 지나다니면서도 자신과 전연 무관한 세계로만 여겼던 청량리 국립정신병원의 진단을 받고서였다.

“체벌 때의 충격으로 뇌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과거에 정신병을 앓은 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날벼락처럼 닥친 일이지요. 나중에 상담해보니 제 아이 경우외에도 군대나 학교 친구들의 폭력 등으로 발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폭력은 그만큼 위험합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해 휴학하기를 여러 번, 청량리 국립정신병원에서 2년간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아들의 투병은 가족 모두의 투병이기도 했다. 밤만 되면 몽유병 환자처럼 몰래 집을 빠져나가 정신없이 도봉산을 헤매고 다니던 아이, 행여 또 사라질세라 다 큰 아들을 부부가 양쪽으로 호위하듯 함께 누워 잠을 자는데도, 잠시만 졸았다하면 금새 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행방을 찾다보면 한밤중 엉뚱한 누군가의 집에 찾아가있거나 경찰서에 신고돼 앉아있는 아이를 데려오는 일도 많았다.

새벽 서너시에도 자신이 좋아하던 선생님 댁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가 하면, 평소 군인을 동경했던 아들은 언젠가 부친 송씨가 군복무 시절에 입었던 대위 군복을 몰래 꺼내 입고 나가 서울 세종로 이순신 동상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다가 가족 손에 이끌려 온 적도 있다.

어떤 날에는 한밤중에 식칼을 들고와 송씨에게 내밀며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프다”며 제발 자신의 가슴을 찔러달라고 애원해 애닯은 부모의 마음을 더욱 미어지게 하기도 했다.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딛는 심정이었다.

아들의 간병을 위해 아내는 일찍 직장에 사표를 냈고, 남편 송씨는 발병 3년째에 접어들던 해부터 신학공부를 시작,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정신가족들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했다. 그 자신도 간병 초기의 어려움이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다.

5년간은 내내 방향점도 없이 우왕좌왕했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겼던 일,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충격과 좌절을 이기기도 어려웠다. 제약회사의 팸플릿이든 의학보고서든, 서적이든 관련된 자료마다 손에 닿는 대로 구해 부부가 밤새 읽어가며 조금씩 희망감을 얻기 시작했다.

“뇌의 척수액에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도파민의 균형이 깨지면서 적정량보다 너무 많이 분비되거나 부족할 경우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정신질환이지요. 따라서 약물로 이 도파민의 적정량만 계속 유지해주면 반드시 치료될 수 있습니다. 다만, 치료가 되었다고 약을 끊는게 아니라 계속적인 도파민 유지를 위해서 평생 약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좀 불편한거지요”


사랑으로 이겨낸 가정의 위기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싸움. 한때는 가정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가족들 모두 한강물에 빠져 같이 죽자는 이야기도 나왔었고, 이혼 얘기가 오간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고생이 심했던 집사람을 비롯해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지요. 실제로 정신병 환자가 있는 가족은 그같은 고통 때문에 가정불화나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도미노 현상처럼 가족 전체가 병이 드는 경우도 있어요.”

다행히 위기를 넘긴 것은 사랑을 통해서였다. 어려움속에서도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신앙인으로서 기도시간은 더없이 좋은 대화 창구였다. 기도시간이면 일부러 온 가족이 한사람씩 돌아가며 기도를 올리게 해 저마다 가슴에 쌓여있는 이야기를 항상 망설임 없이 털어놓을 수 있게 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연 반박하거나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마음에 귀기울여주었다. 집안 분위기가 우울해지면 아픈 아들에게도 행여 절망감이 옮겨갈까봐, 힘들 때면 오히려 큰 소리로 온 가족이 합창하며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열 곡이든 스무 곡이든 상관없었다. 가족들의 화목과 사랑은 환자의 치료에 무엇보다 중요한 1순위 치료약이다.

“한번은 아이의 상태가 다시 나빠져서 이상하다 했더니 저 몰래 약을 안 먹고 계속 버렸더라구요. 야단을 치자 '얼마나 약을 먹기 힘든지 아느냐'며 아이가 우는 겁니다. 그날부터 한달간 저도 아이가 먹는 약을 같이 먹었어요. 실제로 직접 먹어보니 아이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요. 먹기만 하면 온 몸이 다 욱씬거리고 자꾸 나른해지는 것이, 건강한 사람인 저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한달쯤 하고나자 더 이상 아들도 약을 버리는 일 없이 스스로 잘 견뎌주더라구요.”

1995년, 송씨가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시작한 ‘하나님의 교회’ 역시 정신가족들을 위한 나눔의 자리다. 예배 도중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는 사람,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 등 일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풍경도 이곳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당초부터 송씨가 원했던대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돕는 공간이다.

선국씨의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된 것은 약 6년전부터다. 그러나 막상 치료가 된 뒤 부딪친 가장 큰 벽은 세상의 편견이었다.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하려해도 심지어 손쉬운 단순노동조차 맡겨주려 하는 곳이 없었다. 어렵사리 주유소나 식당에 취직했다가도 며칠뒤면 해고를 당했다.

능력 문제가 아니라 선국씨가 먹는 약이 정신병 치료약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주인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이처럼 뿌리깊은 편견과 냉대는 정신질환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와 정보 부족, 사회적 보호장치의 부재, 관련 사건에 대한 언론매체의 선정적인 보도 탓이 크다.

“얼마전 서울 은평구에서 정신질환자가 급식중인 어린이들에게 뛰어들어 해친 사건이 있었지요. 그때도 뉴스에서는 사건의 결과만 부각시켜 결국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니까 정신질환자는 무섭고, 무조건 가둬놔야된다'는 식으로 더욱더 나쁜 인상을 각인시키게 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는 정신가족들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알려졌다시피, 그 정신질환자도 원래는 사고전에 이미 몇번이나 경찰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 요청은 무시당한 채 계속 혼자 방치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그런 사고가 나고 만 겁니다.

정신가족들도 엄연히 세금을 내는 국민의 한 사람인데,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없는 환자라면 국가에서라도 맡아 보호치료해줘야 합니다. 그런 제도적인 역할은 등한시 한 채 모든 것을 환자 개인, 또는 정신질환 자체의 위험성처럼 몰고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아들 선국씨 가스펠 가수로 제2의 인생

이제 아들 선국씨는 직장 생활보다 더 즐거운 평생 직업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2년간 유명 작곡가로부터 전문 음악수업까지 받은 뒤 가스펠 가수로 데뷔, 그간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지에서도 초청공연을 펼칠 만큼 사랑받는 가수다.

특히 정신질환자들에게 남다른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올해 9월 전북 무주리조트에서 출범한 정사모에서는 정신가족외에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전문간호사협회, 임상심리학회 등 의료진까지 약 500명이 모여 사랑의 약속을 다졌다. 2005년까지 10만명의 회원을 모으는 것이 정사모 회장 송씨의 꿈이다. 우리에게도 영화 ‘뷰티플 마인드’는 실현될 수 있을까. 세상에 악수를 청한 송회장의 갈 길이 멀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저는 대학 때 정치학을 공부한 뒤 한때 재야정치권에서도 일했었고, 아들이 발병한 그해까지도 계속 정치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제 인생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 세상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 준 아들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입력시간 2002/11/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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