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나미의 홀인원] '성적순'에서 벗어나자

“너무 즐거웠어요. 뉴욕, 시카고, 마이애미 등 미국 20여개 주를 다니면서 멋진 레스토랑에 가보고 가슴 찡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봤어요. 지역마다 유명한 곳은 한번씩 다 들러 봤어요. 여행이 따로 없었어요.”

미국LPGA에서 1년간 투어를 뛰고 돌아온 프로의 말치곤 다소 의외의 첫 대답이었다. 흔히 미국 LPGA를 경험하고 온 선수들은 언어 장벽과 혼자만의 외로움, 경제적 어려움, 빡빡한 투어 일정, 낯선 환경 등으로 고행에 가까운 고생 길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다 꾀병이에요. 전 너무 즐거웠어요. (수줍은 듯이) 물론 이렇다 할 성적은 못 냈지만…”

긴 웨이브 머리에 서구적인 마스크, 170㎝의 시원한 키에 모델 뺨치는 자태와 밝은 미소를 가진 이선희(28) 프로. 2000년 한국선수권대회 우승, 2001년 레이크사이드오픈과 SK텔레콤 우승, 그리고 그 해에 미국 LPGA 진출권을 획득했던 이 프로는 충분히 2002년 미 LPGA투어 신인왕 타이틀을 노릴만 했다.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내고 돌아와 상심에 빠질 법도 한데 이 프로의 얼굴에는 그런 그늘이 전혀 없다. 오히려 미국 투어의 ‘추억 되살리기’에 바쁘다.

“한국 선수들은 예선에서 떨어지면 바로 다음 대회 장소나 집에 돌아가 하루종일 퍼터 연습만 하죠. 전 그런 생활이 싫어요. 잠깐이라도 좋은 곳에 가서 피로를 풀었죠. 어차피 골프는 평생 할거잖아요.”

이선희 프로만의 여유일까? 아니면 한국 선수들이 너무 골프에만 치중하는 것일까? 이 프로는 미국투어 생활이 힘들었다고 말하는 다른 선수들을 ‘꾀병’ 이라고까지 표현 한다.

“어떻게 힘들 수가 있어요. 매번 잘 해야만 골프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못치고 예선에서 떨어져도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할 수 있다면 기회는 언제나 오는 거 아니에요. 전 꼭 잘 칠 때만 골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나 여성스런 외모에 조심스러운 말투를 가진 이선희 프로가 그처럼 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 이런 부드러움이 이 프로를 지탱해 주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 투어에는 동성애자인 레즈비언이 많다고 한다. 톱 프로는 대개 강하고 남성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일부 프로들은 골프를 잘하려면 남성처럼 강인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자다운 자태와 행동이 장점이었던 이 프로도 처음에는 미국에서 잘하려면 이처럼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돼 힘들었다고 한다.

이 프로는 1년간의 미국 LPGA 경험을 통해 우승에 대한 자신감도 얻었다고 했다. 미국에선 한국 선수들이 골프에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고, 국민 자체가 골프를 다 잘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한국 선수를 만나면 이것저것을 많이 물어본다고 한다.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어떻게 하면 골프를 그렇게 잘 칠 수 있냐?”라는 것이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인데…

한국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덕택인지 몇 년 사이에 미국과 한국의 골프 사정이 바뀐 듯하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매년 미국과 유럽의 남자 대표 프로들이 치르는 라이더컵처럼 5년 후에는 한국과 미국 여자 프로들의 여자 라이더컵대회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한국 낭자들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잘치는 것만이 골프가 아니다”라는 이선희 프로의 말처럼 한국 선수들도 경기 외적인 부문에서도 좀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골프를 오랫동안 즐기며 칠 수 있는 비결이다.

박나미 프로골퍼·KLPGA정회원 올림픽 콜로세움 전속 전 국가대표

입력시간 2002/11/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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