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야인시대 신드롬

“엄마, 나 ‘주먹’ 될래?!”

서울 강남의 주부 K씨는 6살 난 유치원생 아들과 함께 TV 드라마 ‘야인시대’를 시청하다가 깜짝 놀랐다. “나중에 커서 김두한처럼 되겠다”는 아들의 말 때문이었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면서 ‘주먹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시청률이 50%에 육박한다고 하니 가히 ‘국민 드라마’급 태풍이다. 인기는 브라운관을 벗어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주인공들이 즐겨 착용하는 중절모와 트렌치 코트가 유행하는가 하면, 무술학원이 수강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또 ‘야인시대’를 보기 위해 아버지들이 귀가를 서두른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야인시대’에 열광하는 팬들은 “의리에 죽고 사는 거친 남성들의 세계가 매력적이다” “진정한 영웅상을 보여준다”며 흥분한다.

드라마 열풍과 함께 ‘주먹계의 원조’ 김두한은 ‘멋진 남성’의 표상으로 우뚝 섰다. 어린 아이부터 중ㆍ장년층에 이르기까지 ‘김두한’에 열광한다. 사회 일각에서는 “얼마나 영웅이 없으면 폭력배를 다 따라할까”라는 한숨 섞인 탄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러한 ‘야인시대 신드롬’의 이면에는 갈수록 여성스러워지는 남성에 대한 반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변하지 않는 우정, 주먹들의 의협심, 고전적인 영웅 신화 등에 기대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미에 대한 신화를 새롭게 자극하고 있다”는 견해다.

우리의 남성들은 지금 위축되어 있다. 가부장의 권위는 추락해 가정의 중심이 여성(어머니)으로 옮아가고 있으며,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직장 생활의 어려움 등은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얼마 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수입이 적어진 남편을 구박한 아내에게 이혼 책임을 물어 위자료를 배상하게 한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2002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남성들은 끊임없이 여성화를 요구 받는다. 권위주의적 인상을 풍기는 남성보다 자상해 보이는 ‘꽃미남’ 스타일이 사회와 여성들에게 더 환영을 얻는다.

여성의 섬세함이나 지구력 등이 요구되는 정보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남성의 여성화가 필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1930~1970년대를 풍미한 ‘김두한’식 생활방식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기엔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이렇듯 자명한 현실과의 괴리에도 ‘야인시대’는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장치로 강한 남성에 대한 동경심을 여전히 자극한다. 드라마 속 강한 남성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는 유약한 우리 남성들의 뼈아픈 ‘눈물’을 들여다봐야 한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11/14 16:44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