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감동의 파장을 일으키는 KBS '고독'

시청자에게 '운명적 사랑' 화두 던져

“내가 사랑하는 한 당신은 마흔이어도, 쉰이어도 여자” 라는 스물다섯 청년의 말은 미혼모로 15년의 세월을 살아온 마흔살 여성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불씨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브라운관 너머에 앉아 있는 시청자, 특히 중년 여성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은 지난해 김혜자가 무대에 선 연극 ‘셜리 발렌타인’ 에서 “자기를 좋아하고 인정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여자는 다시 피어나는 거야. 열여덟살이든, 마흔네살이든, 예순두살이든”이라는 대사가 던져졌을 때 중년 여성 관객들이 보였던 파장과 흡사하다.

같은 시간대 방송되는 SBS ‘야인 시대’ 의 놀라운 시청률이나 엄청난 신드롬 같은 부산스러움은 없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을 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KBS 미니 시리즈 ‘고독’(극본 노희경, 연출 표민수)이다. 시청자들은 ‘고독’의 대사 하나 하나에 민감한 반응과 감동으로 대응한다. 때로는 고혹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려 한다. 드라마적 상황을 자신 입장에 적용하며 대사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한다.

방송사 인터넷 사이트에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무장한 시청소감 대신 버거운 삶의, 사랑의 경험을 대비시킨 진중한 소감이 올라온다.

여자(이미숙)는 한 남자와의 사랑을 운명이라 믿었다. 하지만 남자는 하룻밤의 정사를 실수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다. 남자의 씨앗을 곱게 꽃 피우지만 그녀의 마음의 밭은 어느 사이 어떠한 감정의 꽃도 피울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돼버린다.

우연히 다가서는 순수한 스물다섯 청년(류승범)과의 만남은 불모의 여자 마음 밑바닥에 숨겨진 여성이라는 존재를 일깨운다. 하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열다섯 나이의 차, 미혼모라는 상황 때문에.

청년을 사랑하는 싱싱한 젊은 여자(서원)의 “사랑하느냐”는 추궁 앞에서 그녀는 허물어지듯 한마디 건넨다. “내 나이 마흔이야. 내 딸은 열다섯이고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고독’은 이처럼 마흔 나이의 여자와 스물다섯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에도 표준이 있는가?

여자 나이 마흔. 시간의 지점 너머에 포진한 함의가 적지 않은 시청자들에게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피천득은 마흔이 된 사람에게 봄이 찾아온다는 것?기적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 최소한 이 땅의 중년의 여성은 그렇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감정은 살아 움직이면 안 된다는 자기 세뇌의 강박관념 속에 살아간다. 인습과 길들임의 편안한 타성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모험이고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타성과 자기 세뇌에 절망하면서도 새로운 시작을 꿈꾸려 한다. 살아 있는, 뜨거운 감정이 있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1996년 30대의 주부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의 ‘애인’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관심을 모은 것과 2001년 40대 중년 유부남과 20대 처녀의 사랑을 다룬 ‘푸른 안개’가 숱한 중년 남성들에게 화제가 된 것은 나이에 주어진 강요된 표준(標準)의 삶을 벗어나는 이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 사랑은 정형으로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고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고독’에 대해 시청자는 마음에서 나오는 환호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유무형의 표준과 금기(禁忌)가 존재한다. 살기 쉬운 방편으로 알게 모르게 만들어 놓은 표준, 그것에 편입돼 순응해 살면 금기는 발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표준에 어긋나면 어느 사이 금기는 얼굴을 내민다.

이 상황에선 때로는 좌절로 금기에 굴복하고 이내 표준의 울타리에 갇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굴의 의지, 사랑의 열정으로 금기의 철옹성을 넘기도 한다.

40대 여성과 20대 젊은 총각이 결혼하는 것과 40대 남자가 20대 여자와 결혼하는 것. 이 둘 중의 어떤 것이 우리 사회에선 표준에 더 가까운 것일까. 열의 아홉은 아마 후자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우리에게 표준의 일탈로 받아들여진다.

일탈에 대해 가해지는 유무형의 압력으로 인해 개인의 감정과 행복은 침탈 당한다. ‘고독’은 일반인들이 굳게 믿고 있는 표준에 어긋난 사람들의 사랑이다.

물론 ‘고독’은 통속적인 소재를 다룬 드라마다. 하지만 소재를 어떻게 담아내고 그리느냐에 따라 드라마는 천양지차다. “드라마는 철학이 아니다”라는 불만 섞인 한 시청자 소감은 역으로 ‘고독’의 드라마 완성도를 말해준다. ‘고독’에서 시청자들은 언뜻 불륜이나 선정적인 장면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 동안 ‘고독’의 작가 노희경과 연출자 표민수가 함께 작업했던 특성이 고스란히 이 드라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와 윤리 지상주의가 교직돼 억누르는 드라마 환경에서 이들은 일련의 작업을 통해 표준을 벗어난 그리고 금기시되어 있는 사랑에 대해 천착해 왔다. 금기라는 것으로 짓누르는, 그래서 불행과 가슴앓이를 하는 소외된 자와 정형을 벗어난 이들의 사랑을 그림으로서 사랑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미혼의 여자선배와 유부남 후배와의 사랑을 그린 ‘거짓말’, 동성애자의 사랑을 그린 ‘슬픈 유혹’ 달동네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을 그린 ‘바보 같은 사랑’ 등이 그들의 함께 한 작품이다.


중년의 사랑 당당하게 그려

어쩌면 지극히 불륜적이고 극단적인 사랑이지만 느낌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작가주의 PD로 불리는 표민수의 스타일은 절제된 대사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철저히 의도된 카메라 워크가 작동해 불륜조차도 외형의 부산스러움이 아닌 가슴의 떨림으로 다가온다.

극단적인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그의 드라마가 통상적인 불륜 또는 통속 드라마와 다르게 평가받는 것은 섬세하고 상징적인 영상 때문이다.

그는 카메라의 직설법이라는 클로즈업 대신에 거울에 비친 얼굴, 백미러에 반사된 모습으로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고 벽과 전봇대 그리고 벽과 기둥의 두께를 조절하며 감정의 밀도를 조정한다. 색상도 그가 시청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주요한 도구이다. ‘고독’ 역시 이러한 스타일을 기저로 깔고 있다.

메시지와 작가의식이 뚜렷한 노희경의 극본 역시 금기된 사랑을 우회하지 않는 정공법의 대사로 그려 나간다. 그녀의 대사에는 감정의 과잉이나 그렇다고 작위는 보이지 않는다. 삶의 그리고 사랑의 진한 향취가 숨어 있을 뿐이다.

대중은 화면의 볼거리만을 취할 뿐 화면의 의도된 장치나 대사에 대해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작품은 대중성 확보에 실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독’은 진부한 선악구도, 신데렐라나 콩쥐팥쥐형의 흔한 인물군을 등장시킨 드라마의 범람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세상사람 대부분이 비난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을 보는 것이 아닐까?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2/11/1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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