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김세환(下)

1971년 윤형주와 함께 데뷔음반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OL3’을 발표했다. 김세환은 학사가수라는 신선함과 연예인 2세라는 후광 덕에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단독으로 재킷 모델로 등장한 VOL4에 담긴 ‘오솔길’에는 사연이 있다. 한 재일 교포에게서 일본말로 배운 노래를 번안해 가장 먼저 방송에서 노래했지만 출연업소 ‘금수강산’에 은희가 찾아와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취입을 앞둔지라 거절했지만 가사만 조금 바꿔 ‘꽃반지 끼고’라고 먼저 취입을 해버렸다. 그는 “내가 표절하게 된 꼴이 되었다”고 숨겨진 이야기를 전했다.

첫 독집 ‘김세환 노래모음-유니버샬’에 수록된 타이틀 곡 ‘옛친구’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전국에서 건전 가사를 공모해 노래말로 택한 이 노래는 1972년 TBC방송가요대상과 MBC 10대가수상에서 남자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김세환은 “아르바이트 가수시절 20만원이던 개런티도 상을 받자 75만원으로 4배가까이 뛰었다. 이후 노래를 해 번 돈으로 75년 막 개발붐이 일기 시작한 강남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게 내 재테크의 시작이 되었지만 30년이 넘도록 가수라는 직업으로 살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하이틴의 최고 스타로 부상한 그에게 영화출연 제의가 밀려들었다. 그는 신성일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과 ‘맹물로 가는 자동차’, 신상옥 감독의 뮤지컬 ‘아이 러브 마마’ 등 영화 뿐 아니라 예그린 뮤지컬 ‘우리 여기 왔다’에서 하춘화와 함께 공연을 했다.

또한 코미디 프로에도 진출해 서영춘, 이주일과 함께 열연하며 만능 엔터테이너의 재능을 과시했다.

74년 김세환은 MBC 10대가수상과 더불어 10회 TBC방송가요대상의 가수 왕에 등극하며 가요계 최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1975년 6월 ‘가수 김세환-탤런트 서미경 열애설’이란 스캔들 기사가 언론을 강타했다.

당시 안양예고생이었던 서미경과 영화 ‘아이 러브 마마’에 함께 출연하면서 같은 학교 여고생들의 시샘이 빚어낸 해프닝이었지만 소문에 소문을 불려가며 한동안 장안을 뜨겁게 달궜을 만큼 김세환의 인기를 반증해주는 사건이었다.

김세환은 “나중엔 애까지 낳았다고 소문이 돌았다”며 곤혹스러웠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1975년에도 TBC의 가수 왕에 올라 포크가수로는 처음으로 2년 연속 권좌에 오르는 진 기록을 세웠다. “가수들에 대한 전국인기투표에서 김세환이 단연 최고였다”는 최희준의 말처럼 전속사인 신세계와 지구레코드 간의 치열한 스카우트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김세환은 인척인 성음제작소 나현구사장에 이끌려 전속을 옮긴 후 두 번째 독집을 발표하며 인기가도를 달렸다. 1976년 가수왕 3연패를 목전에 두고 뒤늦게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벌금 10만원형과 활동금지의 족쇄를 찼다. 공백기인 78년 9월 활동금지 상태였지만 인기가 여전했던 그의 결혼소식에 소녀 팬들은 경악했다.

실제로 한 여자 팬은 그의 디스크와 액자 속의 사진을 박살을 내 소포로 보내오기도 했다. 전성기에 소형 냉장고 박스로 4개나 되는 팬레터와 선물공세를 받았던 김세환은 “중2였던 윤석화도 내 팬이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그 많던 팬 레터가 딱 끊어졌다”고 웃는다.

해금이 되자 “통기타로는 돈이 안 된다”는 성음 나사장의 권유로 그는 80년 5월 ‘어느 날 오후’ 등이 수록된 디스코 트로트 풍의 컴백앨범을 발표하고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 부산에서 시작으로 ‘어느 날 오후’는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이후 성음 나사장의 기획으로 ‘추억의 팝송’ 1집과 81년 엄진의 기획으로 히트곡 모음집을 발매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김세환은 “뽕짝조의 노래가 취입할 때도 어색했다. 너무 줏대 없이 인정에 끌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는다.

82년 9월부터 6개월 간 송창식,윤형주와 공동진행을 맡았던 KBS 2TV의 심야음악프로 ‘노래는 친구’는 새로운 음악방향으로 그를 인도했다. 83년 이들은 김세환과 절친한 김석원 쌍룡명예회장의 지원으로 9,0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입, 일본에서 반주녹음을 해 ‘하나의 결이 되어’라는 공동앨범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나인프로덕션을 만들어 음반제작자로 나서고 89년엔 KBS 1TV ‘쇼 특급’ MC, 91년엔 역삼동에 일식당 ‘모리스시’를 개업해 사업가로 변신한 김세환은 93년에 가족3대가 생명보험협회 기업광고 모델로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0년 송창식, 윤형주에 양희은이 가세한 빅4 콘서트 이후 끊임없이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솔직히 나를 포크가수라 하면 낯이 뜨겁다. 팝 가수가 맞다. 연변가수 한국화의 ‘울고 말았오’라는 트로트 곡을 딱 한번 작곡했지만 삶과 사랑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은 갈증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마이너보다 밝고 흥겨운 메이저노래가 좋다. 가수 영화 코미디 뮤지컬 CM MC 등 다양한 활동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비록 자신의 음악세계를 표현하는 창작품은 없었지만 70년대 젊은이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던 김세환의 흥겨운 노래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명예의 전당에서 빠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입력시간 2002/11/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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