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 사람들은 연말이 춥다하네

[동대문 시장 르포] 체겸경기 꽁꽁, 빛바랜 ' 쇼핑메카' 명성

연말로 가는 길목. 이 때쯤이면 최대 성수기를 맞아야 할 서민들의 시장경기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올해는 대선까지 겹쳐 있지만 서민들이 접하는 체감경기는 5년 전 외환위기 당시와 유사할 정도로 냉각돼 대선후 경기회복에 대한 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12월 6일 동대문 시장으로 통하는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4번 출입구 앞. 최근 잠정 폐쇄한 출입구 앞에는 70세 가까운 한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찐 옥수수와 햇찹쌀, 말린 꼬다리, 과메기 등을 팔고 있다.

길을 지나던 30대 중반의 한 주부가 잠시 발을 멈추더니 꽁치 모양의 코다리 4마리 한 줄(4,500원)만을 달랑 산 후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월드컵 기간만 해도 케이블TV 쇼핑채널을 통해 꽁치 한 꾸러미를 구입, 이웃과 나누던 우리네 여유와 인심을 그녀의 얼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제부터는 절약”이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정치가 밥 먹여줬어?”

지하철 입구 벽면에는 7명의 대선 후보 사진이 붙어 있지만 지나가는 서민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누가되던 무슨 큰 변화가 있겠느냐”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각종 신발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신평화시장으로 가는 먹자 골목에는 점심시간대이지만 한적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불야성을 이루며 지방 손님들이 몰려드는 새벽시장엔 먹자골목도 피크를 이루지만 아직은 아니다.

감자탕 가게 주인 이모씨는 “선거철이면 돈이 돌고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환란 당시보다 더 장사가 안 되는 것 같다”고 울상을 지어 보였다. 기본 소비재인 운동화와 구두, 각종 의류점들이 몰려 있는 신평화시장 상가. 연말 대목을 손꼽아 기다려온 상인들의 표정에는 먼저 한숨부터 쏟아진다.

양화점 S사에 근무하는 김모씨는 “보통 이맘 때면 지방 고객들이 크게 붐볐지만 지방 경기가 침체에 빠져들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상인들이 예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들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씨는 “10월부터 매출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지난달에는 300만원 적자를 봤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대선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서민들에게는 향후 5년간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 선출에 대한 관심보다는 싸늘한 체감경기가 더 가슴을 쓰리게 한다. 체감경기는 한 템포 늦은 경제통계수치를 선행해 실제 생활 속으로 파고 든다.

재정경제부 등 정부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가채무는 약 122조원대로, 5년 전 60조3,000억원 대의 두 배에 달한다. 여기에다 가계부채 급증과 신용불량자 급증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ㆍ4분기(7~9월) 가계신용 동향’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국내 가구 당 평균 빚이 3,000만원을 넘어서고 가계부채(가계대출+물품 외상값) 잔액은 월드컵 당시 보다 6.7% 늘어난 424조3,000억원으로 처음 400조원 대를 돌파했다. 한은은 소득 상위 5%가 전체 금융자산의 38%를 차지하고 중산층 이하 가계 빚은 이미 갚을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두산타워와 밀리오레 등 동대문 대로변에 지난 9월 새로 오픈 한 종합의류 패션몰 APM은 최근 입주자들이 불황으로 장사가 되지 않자 임대자들에 대한 권리금과 보증금 등을 낮춰주는 등 입주자들의 엑소더스를 막기 위한 긴급 대책에 나서고 있다.

여성복 코너의 한 관계자는 “8월까지 인근 패션 몰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다 이곳이 더 나을 것 같아 옮겨왔는데, 최대 성수기라는 연말 매출이 40%정도 줄었다”며 “건물주도 우리네 사정을 감안해 월세를 4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낮춰주었다”고 말했다.


업종 불문, 불황의 늪으로

액세서리 등 잡화부문은 더욱 심각하다.

지하에서 안경점을 하는 허모(39)씨는 “일반적으로 추석후 설까지는 불경기”라고 전제하면서도 “연말 겨울의류마저 불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안경업종은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잡화 상인들에 따르면 경기불황으로 가게 전세를 빼려고 하는 입주자들이 악세서리쪽에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이웃한 패션 몰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밀리오레는 이미 서울 명동점 등 전국 5개 상가에서 기존 상품의 가격을 대폭 인하, 판매에 돌입했고 두타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비해 대규모 사은행사를 벌이는 등 매출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패션 몰은 직영이 아니므로 상인들에게 가격인하를 강제하지 않지만 대부분 상인들 스스로 동참하고 있을 정도다.

외국인들의 ‘쇼핑 메카’로 꼽히는 동대문 상가의 명성도 크게 바랬다. 중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 고객들의 발길마저도 줄어들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 앞에 위치한 한국무역협회 외국인구매안내소에 따르면 올 11월까지 외국인들의 상담 건수는 총 1,956건으로 지난해 2,676건 보다 26.9%가 줄어들었다. 거래 금액상으로 보더라도 11월 말 현재 총 9,278만원으로, 지난해 2억6,948만7,000원으로 1억6,000만원 이상이 줄어든 상태다.

국가별로 보면 외국인 중 일본인이 올들어 지난해보다 무려 절반에 가까운 42.6%, 중국인은 23.6%가 줄었다.

고동철(49) 한국무역협회 외국인구매안내소장은 “국제적으로 경기가 악화되면서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마저 10월이후 급격히 줄어 들었다”며 “6월이후 내수가 위축되면서 지방 제조업체들은 물론 하청 업체들까지 연쇄적으로 생산이 중단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제품의 새 모델 개발 역시 올스톱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 브랜드에 대한 소비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스포츠명품점 그나마 이름값

월드컵 당시 안정환을 내세워 인기몰이에 나섰던 스포츠 웨어 브랜드 ‘퓨마’는 불경기속에서도 그 이름값을 하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 앞에 있는 퓨마 동대문점의 매출액은 월 평균 3억원. 11월 매출은 2억2,000만원을 간신히 넘어섰다. 그래도 이 곳은 명품을 찾는 20~30대 초반의 고객들로 불황을 겪지 않는 편에 속한다.

또 대형 패션몰 지하층에 자리잡고 있는 해외명품 상가 역시 전반적인 불경기 여파로 매출은 평균 30~40% 줄어 들었지만 연말 장세는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길 건너편에 위치한 일반 스포츠 용품점 ‘S스포츠’는 죽을 맛이다. 국산 스포츠용품들을 주로 판매하고 있는 이 곳은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이상 줄었다. 명품점들이 부럽다.

이 같은 양극화 현상은 동대문 시장내에서도 뚜렷이 구분된다. 패션몰 상가의 한 관계자는 “소비위축과 더불어 가계대출 연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연말을 맞는 동대문 시장의 체감경기는 5년전 외환위기 직후와 비교해 더 나을 것이 없다”며 “걱정되는 것은 대선이 끝난 뒤 들어설 새 정부의 내년경기”라고 지적했다.

“장사꾼 치고 장사 잘 된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엄살 섞인 시장의 목소리를 감안하더라도 연말 대선을 앞둔 서민 경제의 체감온도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어 보인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12/17 11:46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