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의 반란 "나는 패션리더"

보온과 건강에서 패션까지, 기능성 제품 다양한 변신 거듭

내가 누구게? 나는 재래시장, 할인점, 속옷 전문점, 백화점까지 없는 곳이 없지. 내가 한가지 색깔이라구?

천만에, 나는 변신의 천재야! 나는 대한민국이야!(왜냐구?) 나는 국민과 함께 성장했지. 나의 역사가 궁금해? 나를 알려주지!


불타는 정열! 나는 빨간색이야.

나는 정열적이지. 그래서 늘 빨간색을 고집했지. 흰색도 있고 회색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내가 빨간 색일 때 가장 나답다며 열광했었지. 재래시장의 속옷가게를 기억해? 날씨가 추워지면 제일 먼저 나를 꺼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으며 추운 겨울, 사람들을 유혹했지.

‘식사했어요?’라는 인사말처럼 밥먹고 살기도 어려웠을 그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은 한해가 다르게 크는 키 때문에 한 치수 큰 나를 사가서 아이들이 늘 울상이었지. 다들 알거야. 살 때는 커서 접었던 옷이 키가 커서 맞을 즈음에는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낡아버리는 것 말야.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소매가 바깥으로 보일까 봐 무던히도 조심하지만 눈치 없이 슬며시 밖으로 나온 낡은 내복을 보고서 아이들이 놀릴 때면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짐짓 아닌 척 억지로 웃기도 했었지. 이 다음에 크면 내복 같은 것은 절대 안입으리라 결심도 했었어. 왜? 시쳇말로 쪽팔리잖아! 그때는 내가 필수품이었지.


공기층이 있는 3중 보온메리, 부모님께 효도하라구!

빨간색인 나를 입었던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나를 거부하기 시작했어. 내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애? 몸에 딱 맞게 입으면 될걸 가지고 굳이 큰 걸 사 입혀서는 접어 입히고 기워 입힌 게 내 탓인가?

가난했던 시절에야 추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찾았지만 난방이 잘 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나는 찬밥이 되고 말았지. 낡은 빨간 내복을 싫어하는 아이들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데 나도 내 살 길을 찾아야지. 그래서 생각했어. 더 따뜻하게 만들어서 연로하신 부모님 곁으로 가자. 공기층이 살아 있는 3중 보온메리! 잘 나갔었지. 부모님이 좋아하시더군.

겨울은 따뜻한 게 제일이지. 난방이 잘되는 아파트보다 찬바람이 센 주택에 살고 계셨던 부모님들은 3중 보온메리의 진가를 알아주시더군. 두툼할수록 인기가 있었지. 솜옷같은 느낌이 들잖아? 날도 추운데 논에서 밭에서 일하려면 얼마나 추워? 젊은 사람들이야 따뜻한 사무실에서 차 한잔 마셔가며 일하고 멋을 내느라 얼어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니 나를 반길 리가 없었지. 하지만 나! 젊음의 열기를 느끼고 싶었어!


내 몸에 있는 키토산, 황토, 숯, 바이오...기능을 보고 선택하라구!

세월이 많이 흘렀지. 풍성한 먹거리에 계절마다 수입되는 수많은 과일들, 건물마다 자리하고 있는 패스트푸드에 길들어 건강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지. 너도 나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귀를 기울이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나도 건강을 입어보자. 내가 두툼해서 촉감이 안 좋다구? 천만에! 실크 같은 라이오셀이 있어. 피부가 민감해? 키토산이지! 원적외선이 들어간 바이오도 있어! 찜질방에 가고 싶다구? 발열효과가 끝내주는 맥반석을 입어봐! 습도조절과 냄새를 제거하는 황토도 있지! 몸이 차다구? 쑥을 입어야지!

스판처럼 잘 늘어나고 면처럼 부드러운 천연섬유로 만든 모달도 있어. 그게 뭐냐구? 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천연섬유지. 자연산이야. 이제 나는 자연주의만을 상대하지. 인위적으로 만든 것에 싫증난 사람들에게 한발짝 다가서기 위해서야. ‘잘 먹고 잘 사자’는 사람들의 외침이 내게도 들렸지. “그래, 내복도 건강을 위해서! 잘 먹어보자! 나는 입는 게 아니라 먹는 옷이야!”


9부, 7부, 반팔에 반바지…레이스에서 꽃무늬까지 나의 변신은 화려하지!

건강을 생각하다 보니 패션을 아는 여자들은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있었어. 내가 너무 투박하고 두툼하대나? 건강을 위해서 입으라고 해도 내복은 나이든 아줌마들이나 입는 거라며 날 외면하더군. 이럴 순 없지.

겨울에 나를 입으면 얼마나 따뜻하고 경제적인데 안 그래? 빨간색이 싫다구? 색깔을 바꿨지. 검정색에 진한 녹색, 눈이 부시도록 하얀 색에다 연한 회색까지 나의 변신은 카멜레온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다양했어. 단순한 무늬가 싫다구? 티셔츠 대신 입을 수 있게 새빨간 장미꽃에서 여성스러운 레이스까지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겼지.

섹시한 게 좋다구? 망사로 과감히 나의 속살을 보였지. 치마를 입는 여자는 불편하다구? 반바지에 반팔! 나의 다리와 팔 길이를 줄였지. 내복을 입으면 둔해져서 신경이 쓰인다구? 몸에 딱 맞도록 조여 주는 스판기능이 있지! 어때? 이제는 나를 州撰?입을 수 있겠지?


2002년 겨울, 이제 나를 패션리더라 불러줘!

나는 이제 단순하지 않아. 사람들은 나를 패션리더라 부르지. 나를 보면 속옷의 모양과 색깔을 짐작할 수 있지. 자연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자연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들을 쓰지. 자연에 가까운 건 나도 좋은 일이지.

요즘 공해가 좀 심한가? 자연주의? 좋지! 하지만 내가 진정 바라는 이름은 ‘패션리더’야. 속옷 같은 겉옷을 입고 있는 요즘(여름에는 끈 하나 달랑 달린 옷들을 입고 거리를 다니잖아?) 나도 밖으로 나오고 싶다는 거지. 나를 카디건 안에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반갑기는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나는 점점 더 화려해지고 얇으면서 따뜻해질거야. 사람들은 나를 계속 찾겠지. 왜냐구? 입어봐서 알지만 나를 한번 만난 사람은 나의 따뜻함을 잊지 못하지.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은 나를 다시 찾기 시작했어. 화려한 무늬와 단순한 문양, 나의 변신을 알아주기 시작한거지. 나를 입고 실내온도를 1도만 낮추면 나라 전체로 연간 1,600억원이 절약되지.

에너지 절약으로 경제적인 보탬도 되고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진 나를 입고 구제 바지를 입어봐! 바로 크리스마스 파티복이 되지. 빨간내복에 이은 나의 신화는 계속되지. 날씨가 추워지면 다시 온다! ‘패션리더’ 내복!

김선희 여성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12/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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