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마'정치] '바보' 대통령에 거는 기대

가슴 흔든 진솔한 당선소감, 국민 모두 표 지김이 정신 발휘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했고 결과가 나왔다.

12월 19일 전국 1만 3,000여 개의 투표소에서 실시된 대선개표 결과 역대 대선사상 최대득표를 기록하며 노무현 후보가 제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개표 상황 내내 양측 후보의 모습을 오가던 카메라가 한쪽으로 고정되고, 즉석에서 당선확정자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

“대화와 타협의 시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성을 기울이는 노무현 당선자의 말은 이전의 그 어떤 대선당선자의 것보다 국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말이 귀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이현령비현령 말들만의 잔치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저 멀리 80년대 초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를 통해 거의 만장일치(95.5%의 투표율에 91.6%의 찬성이라니!)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도 국민 대화합을 외쳤었고, 그 이후 몇 개의 당을 합쳐 떡 반죽을 치며 ‘우리가 어디 남이가!’를 노래하던 대통령 후보 역시 국민통합을 이야기 했었다.

다만 심한 자폐증을 앓았던 당시 우리 정치에 ‘소통’이 부재했었음을 당시 정치권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따름이다. 물론 남들(국민들)은 다 알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폭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불운한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불과 이십여 년 사이 국민들의 욕구는 불감증을 앓는 정치권의 신경계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장막에 균열을 내고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황량하고 메마른 우리 정치풍토에 따스한 온기를 되살리며 피돌기에 힘찬 박동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해냈다” 벅찬 감동

“너무 기뻐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싶어졌고, 저 사람이 우리 대통령이란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32세 주부)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갈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감동입니다.”(45세 회사원)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변화의 욕구’를 드러냈다. 부패정치의 일단보다 덩치 큰 낡은 정치에 더 강하게 반발했으며, 안정적인 보수의 모호함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개혁의 선명함을 선택했다. 우리는 역사의 한 전환점에서 분명하게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고, 당당하게 일보 전진을 이루어냈다.

정몽준의 허접스런 막판 뒤집기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사상 초유의 단독정부를 가능하게 하는 일등공신(?)으로 정리할 수 있다.

어쨌거나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해냈다!’는 충일감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밤을 지새우며 강한 ‘우리 자신’에 대한 열정이 그 출구를 마련해가는 순간에 충실하였다. 역시 월드컵의 감동은 어쩌다 한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뉴스리포터를 따라 서울, 대전, 광주, 부산, 찍고 턴~! 대구 순으로 옮겨가는 카메라엔 각 지역 광장에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제 저녁 정몽준 관련 뉴스 듣고 마음을 졸였는데…기뻐하는 사람들 보니 코끝이 찡해요.”

“많은 감동과 희망을 주었던 분, 내가 뽑은 대통령이 되어서 너무 기쁘고 끝까지 관심을 가질 거예요.”

우리가 바라던 축제라는 게 이런 거였을까. 인터넷도 들썩들썩 밤새 새로운 글이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우리가 새로 뽑은 대통령이 5년 후, 온 국민이 ‘노무현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지금까지 퇴임 시 칭찬받은 대통령 거의 없었지만 이번엔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그래, 믿어보자. 깨끗한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 향후 5년 잘 해주세요! 대한민국 파이팅!”

후보 노무현이 우리의 차기 대통령으로 국민들로부터 ‘찜’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글들이었다.

“멸사봉공하겠습니다.”

당선이 확정 된 다음 날, 노 당선자가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나오면서 방명록에 쓴 글이다. 개표 당일 당직자와 정성을 다해 악수를 나누며 서민들 속으로 들어오던 당선자의 ‘멸사봉공’은 정치판 안에서 여전히 소수인 노무현 당선자가 지금껏 정치권에서 열외에 있던 국민들의 열망을 잊지 않겠다는 작은 응답처럼 빛났다.


여전한 표 몰아주기

한편 19일 TV모니터에 나오는 득표상황만 뚫어지게 보길 몇 시간 째 하던 줌마의 후배네 거실은 처음의 설렘과 기대에 찼던 분위기가 점점 잦아들면서 불쾌한 공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니 당장 가서 호적 파 온나!”

“느(너희)집도 파야 쓰겄다!”

경상도 여자와 전라도 남자가 한 울타리 안에서 아내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산지 10여년. 후배는 선거 때마다 늘 재방되는 경상 vs 전라 버전이 지겨워 ‘투표하는 날 = 일없이 노는 날’로 정하고 확실하게 잘 놀았다.

그러다 이번 선거엔 왠지(정말 왜 그랬을까?) ‘한 표’라도 행사해야겠다 싶어 부부가 나란히 투표하고 기념으로 찜질방에 가서 미역국까지 한 사발씩 먹고 기분 좋게 TV 앞에 앉았다가 기어이 냉장고에 있는 맥주 거덜 내고 말았단다.

줌마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찌감치 저녁밥 해치우고 TV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햐~. 요즘 대선득표 상황 보도는 어쩌면 저렇게 세련되고 알아보기도 쉬울까. 시시각각 득표 상황과 각 지역별 득표상황이 한눈에 쏙쏙 들어왔다.(근데 그게 웬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에 체한듯 갑갑해져 왔으니. 여전히 70~80%에서 많게는 90%가 넘는 ‘몰표’가 지역별로 각기 다른 후보를 향해 던져졌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 어느 지역보다 더 하다는 얘기는 숫자놀음이다. 1999년12월말 기준으로 경상도 인구수를 100으로 보면 전라도는 60을 넘지 못하는 수치다. 게다가 경상도지역은 전라도보다 외지인의 수가 월등히 많다. 그러니 누가 누굴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제 다시 일상이다. 과거에 그랬듯 우리는 다시 일상에서의 지난한 삶을 꾸려야 한다.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어떤 행보를 하는지, 또 그가 내건 정책들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

이는 내 한 표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다. 그러나 역사 수레바퀴를 어느 특정인 혼자 힘으로 굴릴 수는 없다. 우리도 과감하게 우리 의식내부에 무의식적으로 퍼져있는 편집증이란 이름의 호적을 파내자. 이는 우리 의식의 한 자락이 성숙되기를 기원하는 성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5년 후, 다시 우리의 현주소를 보자.

양은주 정치평론가

입력시간 2002/12/2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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