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전쟁이야 나겠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로버트 할리(하일)씨가 TV에 나와 진돗개를 키워본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진돗개는 여러 마리를 같이 키우면 안돼예. 시간만 나면 물어뜯고 싸우지예. 세퍼드나 도베르만, 포인터 같은 사나운 개들도 처음에는 서로 싸우지만 곧 질서가 잡히는데, 진돗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 다음날 다시 상대에게 달려들지예”

할리씨는 어느날 진돗개 다섯 마리를 함께 키우는 사람을 만나 그 비결을 들었다고 한다.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매주 한번씩 멧돼지 농장에 진돗개들을 풀어놓았더니 덩치 큰 멧돼지와 싸우느라 힘을 모우더라는 것이다.

진돗개가 주인을 너무 잘 따르다보니 한국인의 성격마저 배웠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한국인은 몇 사람만 모이면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을 하는데, 위기가 닥치면 똘똘 뭉쳐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우리 특유의 근성을 지적한 것이다.

또다시 벼랑으로 치닫고 있는 북한의 ‘핵 시위’를 보면서 피를 흘린 그 다음날에도 굴복하기는커녕 으르렁거리는 진돗개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강퍅하고 집요하게 미국의 세계질서에 도전해온 북한의 태도를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은 아닐테지만 12ㆍ19 대선 직전에 불거진 북한의 핵시위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핵합의에 의해 설치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감시 봉인을 뜯어낸 데 이어 엊그제는 IAEA사찰단 추방에, 국제사회가 설정한 금지선(red line)인 핵재처리시설의 가동까지 선언했다. 북한 핵문제가 터져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마주보고 달리는 두 기차’란 표현대로 이대로 가다간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대선 캠페인의 잔영이 남은 탓인지 ‘전쟁이야 나겠어’ 하는 막연한 기대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대선에서 2030세대를 결집시킨 인터넷의 주요 사이트에도 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주한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터지지 않는다”는 게 대다수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왜 납니까!! 우리 외채가 750 조원인데 전쟁나면 그 돈 받는 것은 다 포기해야것지. 그 돈은 다 미국계 자본에서 들어온건데…”라며 경제논리를 이용한 것도 있다.

뉴욕타임스의 보수파 논객 윌리엄 사파이어의 ‘주한미국 철수 주장’ (12월 26 일 자)에 대해서도 이를 진지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아무리 부시가 전쟁에 미친 또라이라고 해도 자국민의 생명까지 희생시키면서까지 전쟁을 벌이진 않기 때문”에 “주한미군이나 그 가족들이 비밀리에 철수하는지 감시하자”는 식이다.

한 술 더 떠서 “미군 4만명을 어케 소리 소문없이 빼나요? 94년 핵위기 당시 미군 가족들은 조용히 빠져나갔죠. 미군 가족들도 모두 다 예방접종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이 예방접종하면 전쟁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나름대로 경고도 한다.

그런데 조만간 미군가족이 예방접종하고, 떠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짜 중요한 여기에 대한 논의는 없다. “미국은 비밀리에 주한미군과 미국인들을 불러들인 뒤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폭격을 가한다.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한 북한군은 일제히 휴전선을 넘고… 다시 한국전이 터지고… 폐허가 된 한반도에 다시 유유히 들어오는 미군…” 마치 컴퓨터 게임을 즐기듯 전쟁 시나리오를 묘사한 이들에게 경악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의 핵시위가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고오려는 것일 수도 있다. 94년에는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국제정세는 그때와 너무 다르다. 미국은 테러의 끔찍함을 경험했고, 클린턴 정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강경한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섰다. 또 미국은 ‘팍스아메리카나’를 위해 몇 차례 전쟁을 치렀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행정부가 어떻게든 북한과의 전쟁을 피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하다.

그렇다고 북한이 굴복할까? 최근에 만난 한 탈북자는 “북한은 이미 이판사판이다. 전쟁 나면 똘똘 뭉쳐 싸우다 죽거나, 김정일 체제가 무너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심리가 팽배하다”고 했다. 미국의 위협은 먼저 북한측에 멧돼지 우리 속에 던져진 진돗개와 같이 강한 결속력을 안겨줄 것이고, 그 다음은 어찌됐든 밑져야 본전이라는 뜻이다.

최대 피해자는 바로 우리다. 미국은 핵시설을 부숴버리면 그만이고, 북한은 체제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다. 미국의 핵시설 폭격은 아프간이나 유고, 이라크 공습과 다르다. 미군기가 북한 상공에 들어서는 순간 북한 미사일이 서울을 향해 날아올지 모른다.

전쟁은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너무 무뎌졌다는 점이다. 4050세대가 세상 바뀐 줄 몰랐다가 이번 대선에서 경악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2030세대도 북한 핵문제 만큼은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3/01/02 14:1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