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손자에게 주는 편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03년 1월 13일 새벽 3시30분께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을 든 102명 조선 사람들이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했다. 1905년 4월 대한제국의 이민제한법이 발효되고, 같은 해 11월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돼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7,226명의 조선인이 사탕수수 재배 노동자로 하와이로 건너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한국 하와이 이민사 1896~1910’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웨인 피터슨 교수(세인트 노버트대 역사학)는 한국인 이민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1930년대에 1903년~1905년의 초기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이민은 대부분 도시 출신이며 서울 수원 인천 등지가 많았다. 이들은 본래 한국에서는 농촌에서 살았지만 1894~1905년 사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ㆍ일전쟁, 노ㆍ일전쟁 등으로 도시로 이동한 피난민들이었다. 계층은 상류층이 적었지만 40%가 글은 터득했고 20, 30대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을 떠난 이유는 “외국에서 큰돈을 벌겠다”는 것이 주류였다. 또 중국, 일본의 이민자 50%이상이 고향으로 되돌아 간 반면 한국 이민자는 1,000여명만이 조선으로 귀국했다. 소원으로 ‘교육을 받겠다’‘기독교에 대한 열망을 이루겠다’‘조국개혁과 민족독립에 기여하겠다’ 등이 많았다. 조국을 떠난 이유는 17%가 가난 때문이었다.

1898년의 기근은 농민반란이 일어날 정도 심각했다. 글을 쓸 줄 아는 도시지향의 높은 교육열을 가진 이민자들은 1908년에서 1915년 사이 1,087명이 미국 본토로 옮겨 캘리포니아 주의 포도농장, 콜로라도주의 광산 등에서 일했다. 또한 계약기간이 끝난 이민 노동자들은 하와이의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1930년대 들어서 초기이민자는 20대의 손자들을 갖게 됐다. 이 손자 세대를 대표하는 이가 미주리주 페이에트시 중앙장로대학에서 30여년간 한국역사와 정치학을 가르친 선우학원 박사(아시아에서 미국의 긍지-남한의 경우의 저자)다.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가 편찬한 ‘한국정치론사전(事典)’에는 선우 박사가 체코 프라하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약간의 수정주의적 시각을 가진 냉전학자로 통일에 대해서는 다소 친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선우 박사는 1938년 초기 이민인 평남 대동군 출신인 할아버지 톰(1904년 하와이 이민)이 있는 ‘불령(不逞)조선 대학생’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유학을 온다. 그때 할아버지 톰이 말한 것은 “필설로 말할 수 없는 동물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나라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을 것이다. 실망 하지 말라. 박사 학위를 따라”고 했다.

톰이 말한 민족 자존심의 첫번째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2년전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벌어진 대한제국 외무부 고문 미국인 더험 스티븐슨의 저격사건 이었다. 스트븐슨은 일본 총독의 권유로 외무부에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한국 병탄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 하에 잘 지내고 있다. 일본에 불만인 국민은 소수다. 미국이 필리핀에게 해주는 것보다 일본은 조선에게 더 잘해주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에 톰과 동향인 장인환, 전명운 의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24일 전명운이 먼저 스티븐슨을 저격했지만 불발이었다. 스티븐슨이 전 의사를 덮쳤고 장인환은 인생 처음으로 두발을 발사했다. 스티븐슨은 2일후 죽었다.

1908년 3월 25일자 뉴욕 타임스 사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스티븐슨의 저격 사건은 한국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표현이다. 이 젊은 이들은 사형이나 처형도 두려워 하지 않고 일본에 협력해 한국을 배신한자를 공격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은 존경 할만하거나 현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행동이 가치있는 것이란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장 의사를 하우스 보이로 고용했던 프란시스여사는 재판정에서 말했다. “장인환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탁견이 있습니다. 진지한 사람입니다. 영어를 잘 못 했지만 열심히 해 큰 진전을 이뤘습니다. 나는 그를 내 자식처럼 여깁니다. 그의 행동은 애국운동이지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나는 이 청년이 더 좋아지는군요.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장 의사는 2급 살인혐의로 15년을 선고 받고 10년을 징역 살다가 모범수로 석방됐다. 그후 가난하게 산 그는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한국인이면 그날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권총은 쐈을 것이다”고.

선우 박사는 이민 100주년을 맞아 ‘손자에게 주는 편지’에서 장의사의 뿌리에 대해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미주 한인동포들은 선우 박사의 당부를 잊지 말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3/01/1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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