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특수에 '문턱'이 울고 웃네

실세주변은 신 명소, 대선 결과따라 뜨고 지고…

노무현 체제의 출범은 이념과 노선의 변화에서 세대 및 지역을 둘러싼 인적자원 교체 등 사회 전체의 일대 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주류 세력의 교체와 함께 이념적 스펙트럼도 조금씩 바뀌고, 그에 따른 사회적 가치관과 지향점도 무게중심을 달리한다.

하지만 흔히 변혁의 싹은 무형(無形)의 사회적 자산이 아닌, 돋아나기 쉬운 양지(陽地)에서부터 시작한다. 노 당선자와 실세(實勢) 인사 주변부터 유형(有形)의 사회적 변화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노무현 후보가 후보 딱지를 떼고 당선자 타이틀을 단지 1개월여가 지난 요즘 ‘그들’주변은 늘 몰려드는 인파로 북적인다. 여의도 정가(政街)에도 민주당사에는 오전부터 내방객들의 홍수에 발 디딜 틈이 없다.

당사 주차장은 연일 만원을 이루고 있으며, 의원회관에 있는 노 당선자 측근 의원의 방에는 연일 방문객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노 당선자가 “인사청탁하면 패가망신할 것”이란 준엄한 경고를 내렸음에도 어김없이 핵심 인사들 주변은 눈도장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사무실만이 아니다. 소위 실세그룹이 즐겨 가는 음식점과 커피숍, 대중 목욕탕, 교회 등에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한창 시도되고 있다. 핵심 인사들의 발길이 잦은 곳은 ‘여의도 안테나’ 사이에서 새로운 명소로 부각될 정도.

‘찰나’의 만남도 때론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더구나 인재풀이 협소한 차기 정부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청탁 희망자들은 핵심 인사들의 동선을 따라 신(新) 명소 순회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실세 주변을 배회하는 무리들은 대선 직전까지만 해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주변에 대부분 서 있었다. 당사와 이 전 총재 집 및 개인 사무실, 즐겨 찾는 음식점 등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이젠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한나라당 주변의 다중 이용시설들은 5년 전 대선 직후와 마찬가지로 찬바람만 불고 있는 실정이다.


맨몸으로 20분간 독대의 행운을

노 당선자는 지금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행보를 하고 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의 동선은 주로 당사와 인수위 사무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데 행동 하나하나가 역대 당선자의 권위주의 행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당선자 전담 경호원들이 밀착 마크하고 있다곤 하지만 측근들과 일반 음식점 및 대중 목욕탕 등을 일반인처럼 다니고 있다. 운만 좋으면 얼마든지 근거리에서 만나 당선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노 당선자는 최근 “당선 이후 세번째 대중사우나에 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노 당선자가 즐겨가는 여의도 N호텔 사우나는 ‘혹시’하는 생각을 갖는 내방객들로 고객이 늘고 있다. 한 측근은 “노 당선자가 경호원을 탈의실까지만 있게 하고 혼자 욕실 내부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타이밍만 맞으면 20여분을 독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음식점의 경우는 딱히 지정된 코스가 없다. 하루 10여개의 스케쥴을 소화하기 위한 이동이 많아 한가롭게 기호에 맞는 단골 식당을 가기에는 힘들다. 선거기간 이전에는 종로구 K 한식점을 애용했다고 해서 한때 이곳을 찾는 인사들도 있었지만 대선 이후에는 노 당선자의 발길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노 당선자의 명륜동 빌라 주변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주민 통행량이 급증하는 ‘신 명소’로 뜨고 있다. 성균관대 앞 명륜동 지역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행인들은 얼마든지 노 당선자 자택을 구경하며 지나갈 수 있다. 차량통행 시에도 보초를 서는 경찰들이 가벼운 문의외에는 별 제지가 없어 하루종일 버티다 보면 노 당선자 차량과 마주칠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을 예약할 수 있는 교회 예배

접촉이 힘든 실세와의 만남에는 우연을 가장하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없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자연스럽게 속내를 밝힐 수도 있고, 곧바로 후일의 만남을 보장받을 수도 있다.

주목받는 노 당선자 측근 인사로는 임채정 인수위원장과 김원기ㆍ정대철의원,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와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 등. 별도로 만남 약속을 잡기도 어렵거니와 전화통화도 번호표 순번 받듯 기다리고 있어야 할 정도로 접촉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할 수 없이 이들이 다니는 교회나 즐겨 찾는 음식점 등이 ‘접선’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임 위원장과 정대철 의원은 독실한 기독교인. 때문에 주일마다 이들이 가는 교회는 화려한 조명을 받는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11시 예배 때 노원구 상계6동 S교회와 중구 신당동 S교회를 각각 부부동반으로 찾는다.

옆 자리에 앉거나 입ㆍ퇴장시 악수라도 나누기 위해 주변은 늘 혼잡하다. 두 교회 측은 “대선이후 신도 수가 특별히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차기 정부의 실력자가 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와 대통령 정치고문 내정자인 김원기 의원의 경우 청와대 입성 전까지는 당사와 의원회관, 지구당 사무실 등이 주 활동무대이다. 때문에 의원회관 사무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다 아예 집으로 무작정 쳐들어 오는 인사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문 내정자는 “비서실장이란 자리가 참으로 막강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질 못하겠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는 종로지구당 사무실이 공식적으로 외부와의 연락소 역할을 하고 있다. 전화통화를 하려 해도 통화 희망자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 기다려야 한다. 당연히 지구당 사무실은 신 실세와 줄대려는 인사들로 북적인다.

이밖에 새해 첫날인 1일 자택을 개방한 민주당 모 인사의 집에는 하루종일 세배객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오후 늦게까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는데 한 참석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 노 당선자와 가까운 이 인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청탁하려고 온 사람들이 아닌가 짐작됐다”고 정치권의 변화상을 소개했다.


인수위 주변 음식점은 최대 호황

인수위가 들어선 정부 종합청사 별관 부근도 떠오르는 신 명소중 대표적인 곳. 정부 각 부처의 업무보고가 잇따르면서 주변 식당은 예약이 힘들 정도이고, 커피숍도 몰려드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한 한식집은 “인수위가 들어온 뒤부터 매출이 20% 정도 늘었다”며 “오늘도 인수위 관련자 60명이 식사예약을 하는 등 오전 10시에 점심예약이 끝났다”고 즐거워했다.

예약자들은 종합청사에 근무하는 공무원보다 이들로부터 정보를 얻거나 끈을 대려는 각계 인사들이 더 많다는 게 식당 측 전언이다.

커피숍도 상황은 마찬가지. 10여개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깔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온 종일 둥지를 튼 채 귀엣말을 나누고 있거나 서류봉투를 펼쳐 보이며 심각한 논의를 하는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한 기업 관계자는 “주요 기업들은 매일 정보팀이 인수위 인근에 캠프를 설치하고 동향을 파악중”이라고 털어 놓았다. 이에 따라 인수위원들이 자주 가는 K, H 한식집과 Y 횟집, Y 커피숍 등이 인수위의 외부 창구로까지 거명되고 있다.

물론 인수위 사무실로 직접 방문하는 장면도 목격된다. 당선자나 측근과의 친분을 내세우며 막무가내로 이력서를 놓아두고 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임 위원장은 아예 방문 앞에 경호실 요원을 배치해 놓고 외부인사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엇갈린 명암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여의도의 상권 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인해 주변 상점들도 덩달아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먼저 민주당 주변은 방문객들이 넘쳐 나는 바람에 식당가와 커피숍 등은 늘 빼곡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원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 인구집중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점심때는 아예 자리가 없기 때문에 오후1시 이후나 오전 11시30분께 식당에 들어서야 간신히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반면 대선패배의 한나라당 주변은 좀 과장해서 이야기할 경우 인적조차 드문 편이다. 대선때는 주차공간이 없어 길가까지 차량행렬이 늘어서 있었지만 이제 그런 광경은 볼 수 없다. 주차공간도 여유있고 주변 식당가도 예약이 한결 수월하다. 불과 한달사이에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이 전 총재의 후원회 사무실이 있던 여의도동 부국빌딩의 경우 드나들던 인파로 빌딩 전체가 들썩였지만 사무실이 폐쇄이후에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종로구 가회동 이 전 총재의 자택 주변도 평범한 주택가로 되돌아왔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1/24 10:09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