怒한 盧 "공무원을 손 보마"

공무원 길들이기에 매서운 채찍, 개혁의 칼 벼른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출범을 며칠 앞둔 지난해 말. 인수위원 내정자 J씨와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이것 저것 질문거리를 많이 준비해 갔는데 거꾸로 질문이 날아왔다.

“괜찮은 부처 공무원 좀 소개시켜 줄 수 있어요?”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한다는 이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더니 대번에 말 허리를 자른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물이 덜 든 사람’이 필요하단다.

정부 부처 국장, 아니 과장급만 돼도 이미 사고가 틀에 박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부연이다. “이전에도 공무원들과 일할 기회가 몇 번 있었잖아요. 어찌나 능수능란하게 요리조리 피해가던지 기겁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야 국ㆍ실장급 공무원들과 접촉하게 되겠지만 정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은 거예요.”순간, 새 정부와 공무원과의 관계가 편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선공당한 인수위, 공개 반격

예상보다 일찍 힘 겨루기가 시작됐다. 1월 초 인수위 경제분과가 재정경제부로부터 올해 경제운용 계획을 보고 받고 논의하는 자리. 인수위원들은 새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계획안을 놓고 재경부 관료들을 호되게 질책했다.

한 인수위원은 “분배와 성장의 균형을 강조하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과는 너무 달랐다. 선거 기간 중 집중적으로 강조했던 노동, 노인 복지 등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에이스’급 경제통을 모아 놓았다는 재경부 관료들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할까. “우리라고 아무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재경부 내부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을 모두 포함시켜 제출해 본 거죠. 첫 만남인데 인수위원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재경부 고위 관계자의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어투였다. 이야기는 곧바로 인수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인수위원들은 지금 소모성 정책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부의 대물림을 막겠다고 상속ㆍ증여세에 대해 완전 포괄주의를 도입하겠다고 합니다. 정책 방향에는 물론 동의합니다. 문제는 제도를 도입했을 때의 효과예요. 지금도 상속ㆍ증여 행위에 대해 99% 과세가 이뤄지고 있는데 나머지 1%에도 세금을 물리겠다며 위헌 시비를 무릅쓰며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격이죠.”

계속된 부처 업무 보고에서 법무부가 인수위의 검찰 개혁안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노동부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허용할 수 없다고 큰 소리치는 등 초반 주도권은 정부 부처가 쥐고 있는 듯 했다. 한 부처 관료는 “우리는 닳고 닳은 사람들이다. 답변의 공식을 줄줄 외고 있는데 뭐가 어려울 것이 있겠느냐. 해당 분야 전문성에서도 밀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인수위의 반격은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공개적이었다. 노동부의 업무 보고 자리에서 박태주 전문위원이 노동부의 ‘불성실한’ 보고 내용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며 보고회장을 뛰쳐나간 것. 박 위원은 “어떻게든 공약을 수용해 보겠다는 생각 없이 무조건 ‘NO’로 일관하는 노동부와는 대화를 해봐야 필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수위 내부에서 조차 “정책에 대한 견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화까지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냐”며 박 위원의 행동에 좋지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진영의 공무원 길들이기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노당선자 “공무원은 자만 말라” 일침

며칠 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공무원 사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인수위 직원 조회를 겸한 임명장 수여식에 참여해서다. “법적으로 인수위는 인수 준비 단계에 있는 것이지,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하는 권한은 갖고 있지 않다”고 인수위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러면서도 비판의 초점은 현 정부의 관료들에게 맞췄다. 그는 일부 부처의 태도를 ‘심판자’에 빗대며 “공약에 대해 부처의 찬반을 결정하는 시기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미 공약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평가를 받은 만큼 결정은 우리가 한다.

‘된다’ 혹은 ‘안된다’고 심판하지 말고 실제 적용 시 효과나 문제점 등만 제시하라”는 주문이었다. 또 “공무원들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일하고 있으나 각도를 달리해 보면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일부 부처가 (인수위가) 지나친 자료 제출을 요구한다고 한다든지 가시적 성과도 없이 고충이 많다는 등의 불평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정부 부처가 인수위의 정책 자료 유출에 대해 보안 의식이 없다고 지적하는데 행정 부처 입장에선 비밀 자료라고 해도 인수위는 정책 자료로 공개할 수도 있다”고 퍼부었다. 일부 부처의 뻣뻣한 태도를 사실상 ‘월권’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도 공직 사회에 자신의 의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였을까. 며칠 지나지 않아 인수위 전체 회의에서 다시 한번 정부 부처의 고압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 “인수위가 당장 입법이나 예산을 고려해서 정책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산 구조도 재편성될 수 있으므로 예산이 없다고 일부 공무원들이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남태령도 넘기 전에 긴다

노 당선자의 잇단 가시 돋친 발언은 과천과 세종로 관가의 분위기를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인수위 출범 초기부터 ‘알아서 기던’ 일부 부처와 공무원은 물론이고 정면 돌파할 듯 기세 등등했던 관료들까지도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싫으면 공무원 생활을 접어야지라는 자조 섞인 푸념과 함께.

과천 청사의 한 고위 관료는 “남태령(과천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길목)도 넘어가기 전에 긴다는 농담까지 생겼다”고 했다. 한 과장급(4급) 공무원은 “1급쯤 되는 윗사람들이야 신경이 곤두서 있겠지만 우리들이야 그저 관전꾼일 뿐”이라며 ‘윗분’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사실 1~2급 관료 상당수가 K1(경기고) 등 주류 인맥들 아닙니까. 사회의 비주류가 대권을 잡으면서 가뜩이나 노심초사했던 마당에 막상 군기 잡기가 시작되니까 우왕좌왕하는 것 같아요.”

이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납작 엎드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성 싶은 최근의 양상이다. 공약(公約)이 정부 부처의 반발로 공약(空約)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당선자가 사전에 매를 들어 공무원 길들이기에 나선 차원이라면 “몇 대 맞고 말면 그만”이다.

문제는 ‘토론 공화국 건설’ ‘다면평가제 도입’ 등 당선자의 일련의 발언들은 관료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에 익숙한 공직 사회에 대대적인 메스를 들이대겠다는 경고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새 정부의 공무원 사회에 대한 인적 물갈이를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설마 그렇게 과격한 방법을 쓰겠어요? 가뜩이나 정부 내 인력 풀이 부족하고 편협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마당에 공무원 조직까지 뒤흔들어 유리할 게 없을 텐데요.” 최근 몇 차례 1급 승진에서 누락돼 전전긍긍하는 한 인사의 기대 섞인 답변은 속마음이 편치 않음을 반증했다.


정부조직개편에 촉각 세워

몇 달 뒤면 공론화할 정부 부처 조직개편도 공무원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인 동시에 인수위측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폐지설이 나도는 한 부처의 공무원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살아 남느냐, 아니면 도산하느냐의 중대 기로나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고 표현했다.

새 정부의 재벌 개혁 기조와 맞물려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등 갖은 얘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진 바 없다. 노무현 정부는 인수위 활동이 끝난 뒤 조직 개편 문제를 공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DJ 정부의 인수위가 이른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며 조직 개편을 단행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각에서는 ‘히든 카드’를 끝까지 움켜쥐고 부처 공무원들을 길들이기 위한 고도의 계산이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한 인수위원은 “조직 개편에 대해서는 개괄적인 견해만 새 정부에 전달할 계획인데도 각 부처의 로비가 대단하다. 왜 자기네 부처가 살아 남아야 하는 지에서부터 다른 부처의 영역을 빼앗아와야 하는 이유까지 구구절절이 늘어 놓는다”고 전했다.

공무원 사회 내부에서도 물론 최근의 사태를 반기는 이들은 있다. 일부 개혁 성향 세력들이나 그간 한직에서만 맴돌던 이들은 “언젠가는 거쳐야 할 변화”라며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다. DJ 정부가 ‘4개 개혁’으로 재벌, 금융, 공공, 노사 개혁을 주창했지만 미완의 개혁으로 평가절하된 가장 큰 부문 중 하나가 공공 부문이었다.

‘17부2처16청1외국’으로 출범했던 ‘작은 정부’는 임기 후반 ‘18부4처16청’의 ‘거대 정부’로 다시 바뀌었고, 야심차게 시작됐던 개방형 임용제는 사실상 이름뿐인 제도로 전락했다.

“외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일하는 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위로는 정치권의 의중을 살피느라 바쁘고, 아래로는 밀어붙이기 식 권위만 살리고….” 경제 부처 경력 15년째이지만 아직 핵심 부서에는 진입해보지 못한 한 공무원은 변화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재벌개혁 위한 사전 정지작업

그렇다면 새 정부의 공무원 길들이기 시나리오의 엔딩은? 이를 조금이나마 가늠케할 인수위 핵심 관계자의 언급.

“재벌 개혁을 위해서는 공무원 조직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우선은 인수위 활동에 공무원들이 적극 협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급선무죠.” 지금의 공무원 길들이기는 인수위의 정책 집행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사회도 본격적으로 개혁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배타적인 관행에 젖어있고, 정해진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밀어 붙이기 식 일처리에 익숙해있던 공무원 사회 주변에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변화의 회오리가 서서히 맴돌고 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1/24 13:38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