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匠人열전] 세계에 눈뜬 소리꾼 장사익

'쪽팔림'없는 음악과 인생의 모색

눈을 등짝에 인 채 한겨울을 나고 있는 북한산은 보기만 해도 시리다. 북한산 자락에서 인왕산을 마주 보는 서울 서대문구 홍지동 자택, 햇볕이 기분 좋게 쬐는 거실에서 그가 태평소를 꺼내 들었다. 거실의 창을 가득 메운 산은 인왕산.

널찍한 창틀속에 투영되는 바위산은 바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의 모델이 됐던 풍경이다. 정갈하게 갈무리 돼 있는 그의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 그냥 놓여 있지 않다.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의 공간에 놓여 있는 30여점의 흙뭉치도 사람의 시선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하나 하나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데뷔 무대 소문을 듣고 담양에서 순수 자연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토우도 빚는 송일근씨가 인사동에서 치른 전시회 ‘3학년 5반’에 나왔던 작품들이다.

마당에는 징, 풍경, 윈드 차임 등이 장승과 함께 즐비하게 도열해 쉬지 않고 바람의 노래를 들려준다. 뙤약볕이 기분 좋게 드는 1층 창문 옆에는 갖가지 동양란들이 소담스럽게 가꿔져 있다.

장사익(54)씨를 만나, 숨가쁘기만 하던 서울은 미음완보의 멋을 배운다. 보통 때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뒷산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그가 15일은 아침 8시에 일어났다. 14일 모친 제사를 지내느라 밤을 샜기 때문이다. 이어 24일이면 부친 제사를 모셔야 한다. 어김 없이 그는 밤을 샐 것이다.

그가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수상에 빛나는 태평소를 집어든다.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면서 뽑혀 올라오는 태평소 가락이 높푸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삽입된 덕분에 부쩍 친숙해진 ‘능게’ 가락이다.

그의 헌걸찬 목청을 닮아 귀가 쩌렁쩌렁 울린다. 만원 버스 속에도 핸드폰으로 귀엣말을 나누는 화에 배인 서울 사람들에게 “했시유”, “했쥬”라며 서슴잖고 내지르는 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성한 메타포다. 서울과의 첫 대면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음악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인생

1994년 11월 5일 홍대앞 ‘예’ 소극장의 작은 무대였다. 100명 정원의 무대에 이틀 동안 몰려 든 관객이 800여명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무대에 피아노(임동창), 꽹과리(이광수), 모듬북(김규영)이 자리 잡으니 문자 그대로 미어터졌다.

당시 구경 와 있던 음반사 직원의 요청으로 한달 뒤 만들어졌던 음반이 그의 데뷔 앨범이자 출세작 ‘하늘 가는 길’이다. 무대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라이브 무대를 먼저 가진 뒤 취입을 한다는 그 특유의 음반 제작 원칙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것도 재녹음과 편집 등 상식화돼 버린 과정들을 일체 생략하고 맨 첫 녹음(first take)으로 음반을 만든다.

2집 ‘기침’에는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폐암으로 1년 고생하다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기억이 절절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돌아 누워도 돌아 누워도 찾아 오는/환장할 기침’. 신배승 시인의 시는 곧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는 화제의 1집을 두고 “젊은 기운에 들떠 마구 만든 것”이라며 “수록곡들에 일관성 없이 극과 극과 극을 달렸던 것 같다”고 평했다. 2집은 그 자체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도 자의식이 충만했던 작품이다. 자신의 노래가 반주에 끌려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한 데다 병상의 부친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상황이라 매달렸던 작품이다. 대중적 반응은 적었지만 그 자신으로선 가장 애착 가는 앨범이다.

1998년의 3집 ‘허허바다’에서는 초창기의 활력을 되찾는다. 최선배(트럼펫), 김광석(기타), 김은영(해금), 김규형(모듬북), 노름마치(사물놀이) 등 한다 하는 잽이들이 그를 받쳐 주었다. 당연히 즉흥이었다. 그렇게 나온 ‘동백 아가씨’에 사람들은 다시 뒤집어졌다. 이후 4년째 그는 신보를 내지 않고 침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활동을 멈춘 것은 결코 아니다. 2002년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월드컵 시념 서트 ‘우리 대한민국’으로, 앞서 2001년 삼월삼짓날에는 봄맞이 기념 콘서트 ‘봄바람’으로 팬들의 부름에 꾸준히 응해왔다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다

특유의 말투만큼이나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컵에 물이 차면 따라내듯, 채워지면 늘 해왔어요.” 음악 스타일에 변화가 없다는 일부의 볼멘소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풀 오케스트라와도 폼 잡아 봤지만, 결국 남는 것은 자연과 인생을 어떤 식으로 진실하게 노래하는가의 문제”라는 답이다. 그는 “70, 80이 넘으면 나는 그 때의 내 노래를 부를 것”이라며 “만면 가득 주름뿐인 얼굴로 무대에 서서 노래부르고 싶다”고 다짐했다.

아직 이름도 달지 않은 4집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구름이 오면/구름을 타고/바람 불면은 바람을 따라/멀리 멀리 높이 높이’. 아직 제목도 달지 않은 수록곡이다. 1970穗?이장희가 히트시킨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도 완전 자기식으로 부른다. 전반부는 자유 즉흥, 후반은 록으로 부를 예정이다. 2월에 녹음 작업에 들어가, 4월에 서울음반에서 발매할 예정이다.

지금 그는 프랑스 니스에서 23일까지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음악 견본 시장인 미뎀 참가의 준비 작업으로 바쁘다. 그의 공연과 음반 사업 등 음악 비즈니스를 총괄해 주는 기획사 행복을 뿌리는 판의 대표이자 아내 고완선, 사물놀이 주자 오성남(38), 문예 콘텐츠 진흥회 지원 등과 5박 6일 동안 현지에 머물며 자신의 음악을 세계에 알린다.

호흡법에 기반하는 그의 독특한 창법을 한 장의 편집 음반에 담아 ‘동방의 물결(Waves In The East)’라는 제하로 널리 알릴 계획이다. 성공한다면 EMI, 소니, 데카 등 세계 굴지의 음반사와 계약을 맺어 한국음악사를 새롭게 쓰는 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뎀 참가는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다. 그는 2001년 남아프리카에서 열렸던 ‘세계 NGO 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순서 앞에 아프리카인 70여명이 나와 민속 음악과 현대 음악이 혼합된 노래를 부르며 함께 흐드러지게 노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길 수 없다. 부족한대로 보여주자’고 작심한 그는 사물놀이와 기타의 반주로 1시간 반 동안 놀았다. 그를 더 감동케 한 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났다.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에 즉석 화음으로 화답해 오는 것 아닌가.

이제 그의 새로운 도약이 시작된다. 우리 것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 빚어 올린 일이다. 그의 노래는 결코 보통 한국 사람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법이 없다. 미군 장갑차에 횡사한 효순-미선을 추모하는 광화문 시위 현장에도 그는 나가서 ‘낙화’를 절창해 소녀들의 원혼을 달랬다.

“요새 가장 많이 관심을 두는 문제는 단연 환경이예요.” 새 앨범에 수록될 곡 ‘꿈꾸는 세상’은 그의 환경론인 셈이다. 장중한 목소리로 그는 “높고 파란 하늘에서 푸른 날개를 달고 날고 싶어요”라고 곡중에서 한 소절을 내지른다. 2002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의 세계 NGO대회, 12월 환경연대 창립식을 빛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국적 정서 노래하는 휴머니스트

가장 한국적 정서를 노래하는 그는 사실 대단한 페미니스트다. 열살 연하의 아내 고완선에게 ‘백년가약서’를 자필로 쓰고 대청 마루에 액자로 걸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하늘 고완선과/땅 장사익은/금후 100년 동안/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늘 행복함을 유지키로/서약을 씁니다’ 한마디 말이 꼬리처럼 붙어 있다. ‘단, 100년이 경과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합니다’. .

이름 그대로, 생각의 날개(思翼)를 타고 그는 세계를 유랑할 것이다. 인터뷰 중 안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 등을 시시콜콜 챙기려는 기자 버릇이 나오면 그는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묻는 이를 머쓱하게 한다.

“쪽팔려”. 광수(28ㆍ국립국악관현악단 대금), 영수(26ㆍ목원대 국악과 4학년) 등 두 아들을 소개하다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가야금을 탄다는 며느리의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고도 예의 “쪽팔려”다. 잔뜩 긴장한 사람을 눙치는 재주에는 당할 자 없다.

“이 차 좀 드세요. 좋은 차유.” 또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3/01/29 13:4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