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돈, 길을 잃다

저금리·저주가·저지가 '3저'로 갈 곳 없어진 시중자금

“돈이 돈을 낳는다”고 했다. ‘없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일해 봐야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현실이지만,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는 얘길 테다. 아마도 ‘없는 사람’들이 푸념 삼아 혹은 시기심에 주고받던 말이었으리라.

헌데 요즘 시중에 이런 얘기가 자취를 감췄다. “돈이 돈을 낳기는커녕 가만히 있는데도 오히려 돈이 줄어들더라”는 하소연 뿐이다. 과장된 말이 아니다. 얌전하게 은행에 돈을 넣어둬 봐야 세금 떼고 물가 상승분을 제한 뒤 본전만 챙길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시절이다.

한 때 ‘1000포인트’ 까지 간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종합주가지수도 북한 핵 사태와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등 대내외 불확실성에 포위돼 좀처럼 바닥을 확인할 겨를이 없다.

2년 전인 2001년 초. 우리나라 전역에 ‘초저금리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여기 저기서 “돈 굴릴 데 없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래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부동산이었다. 오죽하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 부동산 투자자들의 절대 격언으로 자리잡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부동산도 더 이상 그들 편에 서 있지 않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동산 투기 만큼은 잡겠다”는 노무현 새 정부의 의지는 시장에 확실히 먹혀 들어가는 분위기다. 행정수도 이전이니, 부동산 보유 과세 강화니 하는 강도 높은 정책에 “자칫 토지나 건물에 돈을 계속 넣었다가는 ‘된서리’를 맞겠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저 금리, 저 주가, 저 지가 등 이른바 ‘3저(低)’ (통상 3저 현상은 지가가 아니라 원화 가치 하락을 포함시키는 용어이지만)가 몰아치면서 갈 곳 잃은 돈이 늘어만 가고 있다. 과연 돈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재테크는 없다

한미은행 압구정동 로얄플라자 지점. 어지간한 자산가들은 명함 조차 내밀기 힘들다는 곳이다. 이승용 지점장은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하느냐”는 VIP 고객들의 ‘독촉’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라고 했다.

“요즘은 무슨 빚쟁이가 된 심정입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투자처라도 마련해 줘야 하는 게 저희들의 임무인데 ‘조금 만 더 기다려 보시죠’라는 말만 입에 붙었습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동성은 일반 서민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했다. “진짜 선수들은 지난해 하반기에 부동산이나 주식 등 현물 자산을 상당수 처분하고 현금을 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업 고객들은 더 심하다. 주변에 1,000억원 정도의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단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제조회사나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정보기술(IT) 업체들은 어지간하면 현금을 500억~600억원 씩 보유하고 있어요. 물론 1,000억원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죠.” 수개월 이상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는 현금을 보며 이들의 조바심은 갈수록 커져가는 것 같다고 했다.

경기 용인의 초호화 실버타운 삼성노블카운티 내에 위치한 외환은행 노블카운티 지점 권혁재 PB팀장도 곤혹스러움을 토로한다. “상담을 해 주는 사람이나 상담을 받는 사람이나 그저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허다해요. 아마 그 분들도 요즘은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르시는 것 같아요.”


대기 부동자금 400조원 육박

갈 곳 없는 돈은 지금 온통 “대기 중”이다. “뜨겠구나” 싶은 투자처가 생기면 하시라도 즉각 빼내 옮길 수 있는 단기 금융상품에만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대표적인 단기 부동자금인 투신사 머니마켓펀드(MMF)는 1월 들어 20일까지 잔고가 무려 10조3,700억원이나 늘었다. 총 수신 잔고가 59조원을 조금 넘어선 정도니 20일 동안 수신 증가율을 계산해 보면 20%을 넘는다.

MMF는 단기 금융상품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얻은 수익을 고객에게 되돌려 주는 만기 30일 이내의 초단기 금융 상품. 조흥은행 서춘수 재테크팀장은 “‘기민성’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수익률도 1년짜리 정기예금에 버금가는 연 4.5%에 달해 단기 투자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MMF 뿐이 아니다. 은행권의 수시입출식예금이나 6개월 이하 정기예금, 양도성예금증서(CD) 등에 몰려 있는 돈을 모두 합한 금융권의 단기 부동자금은 무려 370조원이다. 나라 전체가 1년간 생산해 낸 부(富)를 모두 합한 국내총생산(GDPㆍ2001년 기준 540조원)의 70% 가량이 ‘대기 자금’으로 묶여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도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추세다. 최근 대우증권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 등 우량 상장기업 174개사의 현금 보유액은 2001년 말 9조7,000억원에서 지난해말 16조1,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올 연말에는 18조3,000억원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투자할 곳이 없잖아요. 섣불리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당하느니 현금을 보유하는 안정 위주의 보수적 경영 전략을 펴고 있는 거죠.” 대우증권 관계자는 지금의 상황을 “국가, 기업, 가계 등 모든 경제 주체가 현금을 쥐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불확실성 시대에는 안전 자산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기, “골동품이 불티나게 팔린다더라” “고가의 미술 작품이 부유층에게 인기라고 하더라”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위기에는 안전 자산으로 돈이 몰린다”는 평범한 원칙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요즘이라고 다를 리 없다. 최근 각광 받는 대표적인 안전 자산은 채권이다.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해야 하는 회사채야 그렇다고 쳐도 국공채쯤 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확실히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지난해 말 연 5.11% 였던 국고채 3년 짜리 금리는 채권 딜러들의 ‘수익률 게임’ 속에 매일매일 하락하더니 급기야 4.8%대까지 내려 앉았다. ‘AA-’ 등급 회사채 3년 짜리 금리 역시 지난해 말 5.68%에서 1월 22일에는 5.39%로 급전 직하했다.

채권 금리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채권 가격이 올라간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찾는 사람이 많아 채권이 인기라는 뜻이다. 시중은행 채권 딜러는 “채권이 요즘 유일하게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투자처”라고 전했다.

중상주의 시대 부의 상징이었던 금 역시 요즘 인기 상한가다. 시공을 초월해 전쟁 같은 불확실한 상황을 목전에 두고서는 늘 그랬다. 지난해 내내 한 돈에 5만원 안팎이었던 금 도매 가격은 지난해 말 한 때 5만5,000원을 넘나들었다.

동대문 D귀금속 김정훈씨는 “국제 시장에서 금 시세가 치솟고 국내에서도 일부 수요가 몰리면서 금값이 계속 뛰고 있는 추세”라며 “일부 부유층들은 수천만원 어치를 구입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원화 강세- 달러 약세’의 최근 추세에는 역행하는 처사이지만 “원화 보다는 달러가 낫다”며 해외 자산에 눈길을 돌리는 이들도 속속 눈에 띈다. 제일은행 잠실서지점 임숙이 PB팀장은 “오죽했으면…”이라며 말문을 연다.

“전세계적인 달러 약세 기조가 당분간 계속될 킷窄?극구 말리고 있지만 연세가 지긋한 분들을 중심으로 일부 달러 수요가 생겨나고 있어요. 아마 북한 핵 문제 등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은행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디노미네이션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면서 원화에 대한 불안 심리를 부추기는 것 같다고 했다.

‘금리 급락 이후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중자금이 행선지를 주식시장으로 틀어 잡았다. 또 다른 탈출구인 부동산도 덩달아 시세가 꿈틀거리고 있다.’ 1998년 12월12일 한 일간지 경제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은행, 부동산, 주식의 기상도는?

일시적으로야 돈이 부동자금으로 대기하기도 하고, 채권이나 금 혹은 골동품 등 안전 자산에 몰릴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돈이 흘러 갈 수 있는 곳은 은행 아니면 주식,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 밖에는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하지만 2003년 초 은행 금리의 기상도는 그다지 맑지 않다. 채권 금리가 갈수록 하락하면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금리 인하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근 채권시장에서 콜금리 대비 단기금리의 스프레드(금리차)가 통상적 금리 인하 시기의 수준으로 좁혀지고 있다.”(현투증권 리서치센터 최재호 연구원) “지난해 문제가 됐던 가계 대출이나 부동산 가격 급등세가 안정세에 접어든 만큼 시장에서는 경기 대응책으로 금리인하론이 등장하고 있다.”(대우증권 신후식 수석연구위원) 만약 콜금리 인하가 단행될 경우 은행권으로부터의 자금 이탈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수도 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도 ‘회색 빛’ 일색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신인석 연구위원은 “최근 부동산 가격의 거품이 빠지는 것은 새 정부의 정책 의지가 시장에 확실히 전달됐기 때문”이라며 “현재의 추세를 감안하면 당분간 부동산 시장에 다시 돈이 몰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록 기대감이 잔뜩 섞인 전망일지는 몰라도 결국 전문가들의 견해는 ‘주식 대세론’에 모아진다. 북핵 사태, 이라크 전쟁 등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먹구름이 사라지면 주식 시장에 대세 상승을 기대해봐도 좋다고 단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우증권 신 연구위원은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 자체는 상당히 견고하다. 주식 시장에 돈이 몰리기 시작하면 기업들이 이 자금으로 새로운 설비 투悶?나서 경기 회복에 탄력이 붙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윤한근 금융시장국장도 주식 시장 낙관론에 힘을 보탠다. “2ㆍ4분기, 늦어도 하반기 쯤이면 상승 전환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악재는 감춰져 있을 때 악재이지 일단 현실화하고 나면 호재로 돌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대외 악재를 상반기 중에 모두 털어내고, ‘노무현 호 경제’가 무난히 연착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시나리오일 테지만 말이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1/30 14:11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