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묻지마'에 돈이 몰린다?

부유층 최적의 재테크 '무기명 채권'

“30개(30억원) 정도만 구해줄 수 있어요?” 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 팀장 S씨는 최근 모 식품회사 대주주로부터 ‘물건’을 구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기명 채권’ 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용도에 대해 굳이 꼬치꼬치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3년여 전인 1999년 말에도 이미 ‘30개’를 구해준 터였다.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이길래”라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금융 자산만 수백억원에 달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S씨는 평소 거래가 잦았던 한 증권사를 통해 매물을 구해봤지만 허사였다. “공급이 아예 씨가 말랐다”는 답변 뿐이었다.

“묻지 마세요.” 부자(富者)들의 외침이 요란하다. 돈 길은 막혔고, 세법의 굴레는 갈수록 죄여 든다. 어차피 돈 불리기를 못할 바에야 돈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겐 최선의 재테크인 시절이다. 세금도 묻지 않고 출처도 묻지 않는다는 자산만 있다면 무조건 ‘OK’다. 만기를 수개월 앞둔 ‘무기명 채권’이 부유층 재테크의 탈출구로 각광을 받으며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일명 ‘묻지마 채권’으로 불리는 무기명 채권은 발행 당시만 해도 ‘미운 오리 새끼’ 였다. 외환 위기 초기인 98년, 정부는 부유층의 자금을 끌어 들여 시중 자금난을 덜겠다고 무기명 채권을 발행했다.

고용안정채권 증권금융채권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등 3종류로 액면가로만 총 3조8,000억원 어치에 달했다. ‘만기 5년, 표면 금리 연 5.8~7.5%’. 1년 짜리 정기예금 금리가 5%에도 못 미치는 요즘에야 “그럭저럭 괜찮은 상품”이라는 평가가 나올 법하지만 당시는 사정이 달랐다.

“시중 금리가 10%를 넘던 시절이었어요. 금리가 절반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누가 관심을 가졌겠어요?” 서울 명동 한 사채업자는 당시의 냉랭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액면가 1만원 짜리 무기명 채권이 8,500원에 시세가 형성됐는데도 사려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을 정도”라고 했다.

증권금융채권은 발행액 2조원의 절반도 넘는 1조2,000억원 어치가 일반에 판매되지 않아 증권사와 투신사에 반 강제적으로 배정돼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운 오리’는 ‘백조’로 탈바꿈했다. 상속세ㆍ증여세율 인상, 금융소득종합과세 실시, 국세청의 특별 관리 강화 등 고액 자산가들을 옥죄는 제도들이 잇따라 도입됐다. 아무리 뛰어난 재테크 감각을 발휘해가며 ‘돈벌이’에 나서봐야 세금으로 뜯기고 나면 수지가 맞을 리 없는 장사였다.

99년, 2000년 무렵이었다. 외환은행 오정선 PB팀장은 “금리를 조금 손해 보더라도 무기명 채권을 구입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유리하다는 발 빠른 계산이 부유층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 이 때”라고 전했다.


실보다 득많은 절세상품?

현재 액면가 1만원 짜리 무기명 채권의 시세는 무려 1만5,500~1만6,000원 가량. 공개적인 시장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몇몇 큰 손이 몰릴 경우 1만8,000원까지 치솟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사채업자들의 귀띔이다.

전성기였다는 2000년 무렵에도 시세가 1만4,000원 정도에 불과했으니 지금이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셈. 채권 만기(7~12월)에 금리를 얹어 받을 수 있는 돈이 1만3,000~1만4,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지금 채권을 구입하는 사람은 채권 1장 당 2,000원 가량은 손해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굳게 믿고 있는 서민층들에게 의문이 들만도 하다. “도대체 만기 환급액 보다도 비싼 돈을 주고 무기명 채권을 악착같이 구입하려는 이유는 뭐요?” 전문가들은 “채권 매매에서 손해를 보는 부분 보다 세금을 줄여서 얻는 이득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60억원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현재 증여세율은 과세 표준이 30억원을 넘는 금액에 대해 50%가 적용된다. 30억원으로 무기명 채권을 구입하면 3억~4억원 정도 매매 손실을 입겠지만, 세금을 15억원이나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결국엔 10억원 이상 이득을 본다는 얘기다.

무기명 채권은 부자들에게 ‘감시로부터의 해방’도 만끽하게 해 준다. 부자들이 속성상 감시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혜택이다.

“무기명 채권은 누가 얼마를 갖고 있든 간에 국세청의 자금 출처 조사도 받지 않습니다. 조그만 아파트 한 채만 구입해도 운이 나쁘면 자금 출처 조사를 받아야 하는 세상인데 얼마나 큰 이점입니까.” 삼성증권 채권영업팀 관계자는 무기명 채권의 이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게다가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아니어서 분리과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종합과세냐 분리과세냐 여부는 단순히 세율의 차이 뿐 아니라 국세청의 감시망에 걸려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시만 받지 않는다면 1억~2억쯤은 손해볼 수도 있다는 부자들은 숱하다”는 설명이다.

상속세나 증여세가 완전 면제되고, 국세청의 자금 출처 조사도 전혀 받지 않고,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1석3조의 ‘희귀한’ 상품인 셈이다.

새 정부의 분배를 강조하는 조세 정책도 최근 무기명 채권의 인기에 톡톡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상속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 도입을 공약하는 등 부의 대물림을 철저히 차단하겠다고 나서면서 부자들의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해있다. “만기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가격이 더 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묻지마’에 뒤따르는 부작용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물은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다. 상속이나 증여 문제를 모두 해결한 부유층이 가격이 오를 만큼 올랐다고 판단해 일부 남는 물량을 내놓거나, 급전이 필요한 자영업자가 별 수 없이 내다 파는 것이 고작이다. 한 채권 브로커는 “98년 무렵 8,500원에 채권을 구입한 사람은 이미 100%에 가까운 수익률을 올렸으니 불만족스러울 게 없다”고 말한다.

‘묻지마’의 속성 상 각종 부작용도 동반한다. 정부가 세금 면제라는 ‘면죄부’를 줬건만, 부유층들은 한 발 더 나아가 ‘탈세’나 ‘정치자금 제공’ 등의 뒷거래에까지 적극 이용한다. 채권 브로커 임모씨는 “당기순이익을 100억원 낸 한 기업이 무기명 채권을 구입해 의도적으로 50억원의 손실을 냄으로써 법인세를 절감한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위조 채권도 시중에 심심찮게 떠돌아 다닌다. 자금 출처를 숨기고 싶은 부유층은 사기꾼들의 집중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H증권에서 10억원 짜리 위조 무기명 채권 사고가 발생하는 등 ‘가짜 채권’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임씨는 “부유층들은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해도 절대 외부에 알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마 실제 위조 사건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1/30 14:21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