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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와 高의 위험한 동거

盧와 高의 위험한 동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고 건 국무총리 내정자의 동승(同乘)을 놓고 정치권 일부에서는 ‘극과 극의 만남’이란 평가를 내놓는다. 개혁과 변화의 주체 세력인 노 당선자와 보수 색채 속 안정희구 세력의 대명사 격인 고 총리 내정자는 출신 배경과 경력은 물론 이념과 노선, 정치철학 등 어느 분야에서도 합치되는 구석이 없어서다.

노 당선자는 당선 이후 “대통령이 개혁 성향이므로 국무총리는 안정 지향적인 인사가 합당하다”고 밝혔다. 개혁과 안정의 조화를 강조했고, 고 총리 내정자도 이에 화답하듯 1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안정 속의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 낙점은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1년여의 국정 1기를 안정되게 운영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이 정치개혁에 무게를 두는 대신 행정에 정통한 국무총리가 실질적으로 내각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책임총리제’를 염두에 둔 인선이다.

그러나 이번 인선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긍정적인 쪽에서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 전 총리에게 안정적인 내각운영을 맡기고 노 당선자는 개혁의 전면에 나서 변혁의 칼을 휘둘러 달라고 바라고 있다.

여기에는 노 정권에 대한 미지의 불안감을 고 총리 내정자가 상당부분 불식시킬 것이란 기대도 곁들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개혁과 안정의 만남은 지극히 불완전한 조합이다. 노 당선자가 취임 후 어떤 분야에서 개혁정책의 강력한 드라이브를 시도한다고 가정하자. 이에 고 총리 내정자가 사회적 안정을 이유로 속도조절을 요구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대통령이 개혁을 포기하거나 총리가 이전의 대독총리로 물러나는 것 뿐이다. 이를 놓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개혁에 대한 ‘NO-GO (盧ㆍ高) 콤비’라고 폄하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 고 전 총리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후자쪽이 더 우세한 편이다.


盧, 안정된 국정운영속 정치개혁 매진

노 당선자는 최근 KBS TV 국민과의 대화에서 “안정된 항해사가 국정의 흐름에 따라 항해를 계속하고 수리할 것은 알아서 해야지 선장이 자꾸 들락거리면 항해가 틀어질 우려가 있다”고 초기 국정운영의 기조가 안정 속 개혁에 있음을 시사했다.

총리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대통령은 정치개혁에 무게중심을 두겠다는 뜻이다. 이 같은 계획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또 민주당 내부도 신ㆍ구 주류간 갈등에 휩싸여 있는 취약한 집권 기반을 감안할때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 정권에서 핵심 관료를 역임한 고 총리 내정자의 경우 반노(反盧)로 대변되는 보수세력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 내기에는 확실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 총리 내정자는 ‘행정 9단’에 해당하는 정통 행정관료다. 이상을 앞세운 개혁정책에 대해 현실적이고도 적절한 조언을 앞세워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순기능적인 측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 전 총리의 국회인준이 남아 있지만 노 정부의 첫 내각은 경제ㆍ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노 당선자는 이를 통해 17대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 확실하다. 개혁은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경우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노 당선자는 고 전 총리에 대한 내정 사실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한나라당을 방문, 서청원 대표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확실히 기성정치와 다른, 다소 파격적인 정치 행보다. 정치개혁을 통해 내년 총선 승리를 겨냥한 노무현식 정치의 첫걸음이다.


盧와 高의 애매한 인연

노 당선자는 대선 직후 고 전 총리를 만나 새 정부 국정방향에 대해 깊숙이 논의했다. 이는 노 당선자가 첫 국무총리로 일찌감치 점찍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는 “12월말 서울시내 호텔에서 노 당선자와 고 전총리를 만나 국정전반에 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사실 노 당선자와 고 총리 내정자는 그리 좋은 인연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좋은 인연이라고 해 봐야 이웃동네(명륜동과 동숭동)에 살고 있고 99년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당시 고 건 서울시장과 국무회의에서 간간이 마주쳤다는 것 뿐이다. 이전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둘은 ‘따로 국밥’같은 길을 걸었다.

노 당선자가 재야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시절 고 전 총리는 내무부ㆍ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며 핵심 관료생활을 했다. 13대 국회 때 노 당선자는 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에 발을 디뎠지만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한 고 전 총리는 고향인 전북에서 황색돌풍에 밀려 낙마했다.

이후 98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공천과정에서 노 당선자는 민주당 한광옥 최고의원과 고 전 총리 등과 경합을 벌였지만 ‘윗 분’의 뜻에 따라 고 전 총리가 낙점되기도 했다.

또 이번 대선 기간에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던 노 당선자가 ‘지지 선언’을 요청했지만, 고 전 총리가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노 당선자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이후에도 고 전 총리는 노 당선자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만약 노 당선자가 후보에서 낙마할 경우 유력한 대타(代打) 중 하나가 고 전 총리였기 때문이다. 이런 다소 애매한 인연 탓에 최종 낙점에 이르기까지 노 당선자의 마음이 적지않게 흔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조사결과 여러 총리 후보중 가장 높은 지지도가 나왔고,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들도 대부분 해소돼 청문회 통과가 순조로울 것이란 판단에서 최종 낙점됐다. 또 노 당선자의 최측근인 김원기 의원이 고 전 총리와 같은 전북 출신으로 교분이 깊고, 인사특보인 신계륜 의원도 고 서울시장 시절 2년간 정무부시장을 하며 보필한 것도 이번 인선에 덕을 봤다.


고 총리 인준 산너머 산

정작 총리에 내정은 됐지만 정식 인준까지는 산너머 산이다. 한나라당 개혁파 모임인 국민속으로가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으며, 민주당 내부에서도 은근히 불만스런 표정이다. 또 노무현 홈페이지 등에도 반대하는 네티즌의 글이 상당수 올라오고 있다.

한마디로 개혁정권의 보수 총리라는 부정교합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를 의식한 듯 김원기 의원은 “고 내정자는 청렴한 공무원에다 시민운동을 많이 한 개혁적 인사에 속한다”며 “이에 노 당선자가 오래 전부터 총리감으로 거명하곤 했다”고 변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총리 인준의 열쇠는 한나라당이 쥐고 있다. 노 당선자가 한나라당을 먼저 찾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나라당은 고 전 총리에 대해 ▦차남 군복무 면제의혹 ▦박정희 대통령 서거시 3일간 사라진 행적 ▦80년 비상계엄확대조치시 정무수석으로 1주일간 출근하지 않은 점 ▦87년 연세대생 이한열군 사망시 내무장관에 복무한 점 ▦90년 수서사건 관련, 서울시장으로 서명했음에도 책임회피한 의혹 ▦97년 환란당시 국무총리였던 점 등의 의혹을 내세우고 있다.

김영일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고 전총리는 행정의 달인이 아니라 처세의 달인”이라면서 “일반적인 평가가 후한 편이지만 철저히 검증을 받으?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규택 원내총무도 “고 전 총리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아직 철저히 검증받은 적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특히 ‘국민속으로’는 “고 건씨는 무사안일의 표본이고 유신정권서부터 6명의 대통령 휘하에서 모두 요직을 맡는 등 처신에 대해 의아한 점이 많다”며 “이는 개혁대통령과 대독총리의 만남”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불만의 싹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공식 발표이전만 해도 정대철 의원은 “옛날에 했던 사람을 다시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했고, 이상수 사무총장은 “안정내각 구현을 위해 기존의 경륜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새 시대에 걸맞은 인사가 나서야지 옛사람으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신기남 의원은 더 노골적이었다. “새로운 분이 나서야지요. 무조건 아는 분이 또 나오는 게 안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하는 게 안정입니까”라는 식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정책에 대한 신념이 떨어지는 데다 논란 많은 정책결정은 위원회를 만들어 책임을 미룬 채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한다는 지적이다. 고 총리 내정자가 맡아야 할 ‘안정’이 미묘한 현안에 대한 책임 회피 쪽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경제회복과 대미 관계 정상화가 새 정부의 시급한 과제이지만 고 총리 내정자와는 거리가 먼 현안들이다. 내달 10일께 치러질 국회 인사청문회가 그래서 더욱 주목된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입력시간 2003/01/3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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