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사기꾼으로 몰렸을땐 포기할까도 생각했죠"

실리콘 소송 승소 이끌어낸 김연호 변호사

“주변에서는 대박이 났다고 난리인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정말 큰 돈이 생긴다면 백혈병 같은 어린 환자들을 돕고 싶어요. 돈만 있으면 고칠 수 있는데, 돈이 없어 죽어간다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겠어요.”

세계적인 기업 다우코닝사를 상대로 한 8년간의 ‘실리콘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김연호 변호사(44). 그의 사무실에는 “갑부가 됐는데 한 턱 쏴라” “멋진 집이 있는데 한 번 와서 봐라”는 등 축하 전화가 연일 빗발친다. 구호 단체의 기부 요구는 물론 집안 식구들로부터 “우리 정말 부자된 거야”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보상 절차가 남아있는 만큼,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입니다. 의뢰인들이 배상을 받지도 않았는데 변호사 수임료를 계산한다는 것도 우습지요. 그런데 최종 승소 판결이 난 뒤 주변에서 하도 말이 많길래 하루는 아내에게 얘기했어요. 진짜 부자가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된다면 아픈 어린이들을 돕자고 말했어요.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국내 피해여성들 2,500만달러 받게 돼

김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미국 연방법원으로부터 가슴성형 수술에 미국 다우코닝사의 실리콘 제품을 사용해 피해를 입은 한국 여성들을 위해 총 2,500만 달러(약 300억원)의 보상금 지급 판결을 이끌어내면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주변의 들뜬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침착한 모습이었다.

1월 2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빌딩 41층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오후에 미국으로 출국해 음력 설 직전에 귀국할 예정”이라며 여행용 가방을 챙겼다.

“미국 배상심의사무소 소장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소위 ‘기름칠’하러 간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겁니다. 의뢰인들의 수술 기록이 부실한 경우가 많아, 그대로 보상심의를 올렸다가는 퇴짜를 맞을 확률이 높거든요. 국내 병원에서는 좋은 시설을 갖추려는 노력에 비해 환자의 기록을 무성의하게 관리하는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려 8년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 ‘실리콘’ 소송은 1970~80년대 다우코닝사가 생산한 유방확대용 실리콘이 부작용을 일으키자 피해자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것이다.

다우코닝사 실리콘은 여성의 가슴을 원하는 만큼 키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수술부위가 딱딱해지면서 피부괴사를 유발하거나 강한 통증을 동반하고, 관절염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다우코닝사는 1993년 관련 제품을 생산을 전격 중단했으나 이듬해 11월 피해자들로부터 거액의 피해 보상 소송에 휘말렸다. 피해자와 다우코닝사의 법정싸움은 5번의 재판을 거쳐 지난해 12월 11일 미 연방법원에서 최종 확정될 때까지 8년간 진행됐다.

문제의 실리콘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시술하기 위해 1980년대 초부터 93년까지 1만여 개가 도입됐다. 이번 집단 소송에 참가한 국내 여성은 모두 1,200여명. 최근에도 400명 가량이 더 신청했다. 그러나 실리콘이 1만여 개 수입된 것으로 볼 때 아직도 숨어서 속앓이를 하는 여성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김 변호사는 소송에서 다우코닝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경우와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투쟁의 강도를 높엿다.

“역사적으로 사례가 없던 일입니다. 오랜 기간 법정 투쟁을 벌이다 보니 자연스레 미국 법정에서 발언권이 높아졌고, 결국 미 연방법원 판사가 합의점으로 이례적인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다우코닝측에서 어렵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번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배상 범위에 포함되자 “의뢰인들은 무임승차가 아니냐”며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8년 전 소송을 맡겼던 의뢰인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소송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 국내 피해 여성인만큼 더불어 배상을 받으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8년 끈 긴 싸움, 시련도 많아

성균관대를 나와 1983년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김 변호사는 군법무관을 거쳐 1989년 2월 개업했다.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법학원 추천으로 미국 하와이대 교환교수로 파견된 것을 계기로 로스쿨을 졸업, 미국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국내에 다시 돌아온 것이 1993년 말. 노모가 중풍으로 쓰러진 데다 둘째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이때 YMCA가 당시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된 실리콘 사건의 한국 피해자를 모집하고 있음을 알게 된 뒤 법률구조 업무를 자청했다.

“국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의욕이 넘쳤습니다. 피해자도 구제하고 변호사로서 자리매김도 하고 싶었습니다. 이토록 긴 싸움이 될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번 소송을 진행하면서 두 번의 큰 위기를 겪었다고 한다. 1995년 실리콘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판정이 나옴에 따라 피해자 보상 계획이 전면 취소된 게 첫 번째 위기였고, 1997년 다우코닝사가 파산신청을 내면서 보상 여부가 불투명해진 것이 두 번째로 닥친 시련이었다.

그러는 사이 금방 종료될 것 같던 소송은 거듭 해를 넘겼고, 피해 여성들이 그를 ‘소송 사기꾼’으로 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무실에 불을 지르겠다’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겠다’ 등의 협박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많이 들었습니다. 집으로도 협박 전화가 와서 3번이나 전화번호를 바꿨습니다. 심지어 사기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죠.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피해 여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애썼습니다. 성형으로 입은 피해라서 어디다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잖아요. 저한테라도 억울함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변호사는 사건 의뢰 당시 피해자 1인당 25만 2,000원을 수임료를 받았다. 이 가운데 17만2,000원은 외뢰인들의 건강 진단서(영문 포함) 등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나머지 8만원으로 기본 소송 비용을 삼은 셈. 사건을 맡은 뒤 두 달 만에 바닥이 났다.

김 변호사는 이후 43평이던 사무실을 같은 건물의 22평 짜리 장소로 옮기고, 은행에 빚도 냈다. “변호사라서 은행에서 돈을 얼마든지 꿔준다”고 농담을 하지만, 매달 한 번 꼴로 태평양을 넘나들며 법정에 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미국 체류기간 동안 비용을 아끼기 위해 허름한 모텔을 전전했고, 미국 법정에 설 때 도움을 줄 현지 변호사를 고용하고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부르지 않았다. “돈 때문이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로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대변한다. 그 동안 수집하고 정리한 피해 사례와 국내외 의학 문건 등 준비 자료만도 20여 만쪽에 달한다.


“불우한 어린이 돕는 일 하고 싶어”

그는 어릴 적부터 실리콘 소송과 같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법조인을 꿈꿨다.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장래희망으로 ‘판사’를 기록한 뒤 한 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억울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학창시절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도 잘 했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법대에 진학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국밥 장사를 하면서 7남매를 공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3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장남에게 그의 대학 뒷바라지를 유언으로 남겼다. ‘장사나 하라’며 상고 진학을 권유했던 아버지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더 진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해전부터 투병 생활을 하면서 죽음을 예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공부시켜줄 능력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장사를 하면 성공하겠다며 설득한 것이죠. 그때는 그런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었는데….”

중ㆍ고등학생이 된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두 자녀들은 아버지의 영향 덕분인지 모두 변호사가 되서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한다. 그런 아들들에게 김 변호사는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힘든 길”이라면서 “돈을 벌려거든 다른 길을 가라”고 조언한다.

김 변호사는 가끔 큰 아들을 보면서 다른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이 생각한다. 장남은 중학교 때 박테리아성 뇌수막염으로 2주 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생사를 오갔다. 다행히 아들은 얼마 안 가 극적으로 회복됐지만, 아동 병원에서 만난 불쌍한 아이들의 기억도 아직도 생생하다. 그가 어린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실리콘 소송으로 인해 8년 간 많은 일들을 접어둬야 했던 그는 이제 미뤄온 계획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우선 유학시절 공부했던 증권, 은행 등 금융부문 관련 전공을 되살려 국내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싶다고 한다.

“외국계 로펌의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하여튼 기존의 활동 경험을 살려 미국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좀 엉뚱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또 다른 꿈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감독입니다. 얼마 전 관련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아내의 만류로 보류해뒀지만, 언젠가는 ‘양들의 침묵’같은 두뇌 싸움이 치열한 영화를 만들 겁니다.”


한국 피해자 보상

미국계 다국적 기업 다우코닝사의 실리콘을 사용한 유방확대수술 등의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은 국내 여성들에 대한 보상절차가 다음달부터 개시된다.

국내 유방확대 수술 피해자들을 대신해 다우코닝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온 김연호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11일 미국 연방법원에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라는 최종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2월 18일부터 전세계 38만 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절차가 시작된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국내 여성들이 받게 될 액수는 1인 당 최대 9만 7,500 달러(약 1억 1,700만원)까지 총 2,500만 달러(약 3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며 “소송에 참가한 1,200명 중 440여명은 다우코닝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해 600 달러(약 72만원)의 위자료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미시간주 동북지구 연방파산법원은 1999년 11월 “다우코닝사는 유방 확대수술 피해자에게 최고 10만달러~ 최저 2,000 달러를 보상하되 한국인에게는 35%만을 지급한다”고 판결했으나 김 변호사는 이에 불복해 2000년 3월 항소했다.

당시 국내 피해자들이 받을 수 있는 배상금 전체 규모는 300만 달러 선이었으나 이번에 배상액이 2500만 달러로 8배 이상이 늘었다. 이번 판결에 따른 보상액은 한국인 1인 당 국내 총생산(GDP)을 감안해 미국인 피해자 대비 35~60% 수준에서 결정된 것이다.

이번 판결에 따르면 소송에 참가하지 못한 피해자들도 4월 18일까지 사건을 신규 접수하면 배상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추가 배상을 받기 위해 다우코닝 제품을 사용했다는 제품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는 등 미국 법원이 정한 다소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보상금은 유방확대 수술의 경우 보형물 제거비용 3,000 달러, 실리콘백이 체내 파열된 데 따른 피해보상 7,000 달러 등이다. 다른 신체 부위에 대한 질병 보상금은 턱ㆍ얼굴ㆍ코의 경우 1,750 달러, 무릎 2,625 달러 등 부위별로 1,750~3,500 달러다.

다우코닝사의 실리콘은 1980년대초부터 93년까지 1만여 개가 국내에 수입됐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국내 피해여성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의 실리콘은 수술부위가 딱딱해지고 통증이 유발되며, 피부괴사나 관절염 등의 부작용도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우코닝사는 유방확대 시술용 실리콘 등 의료용 실리콘을 생산해왔으나 1993년 피부 손상 등 부작용 문제가 제기되자, 관련 제품의 생산을 중단했다. 피해 보상 소송은 1994년 11월 제기된 뒤 5번의 재판을 거쳐 지난해 12월 11일 미 연방법원에서 최종 확정될 때까지 장장 8년간 진행됐다.


실리콘 보형물 '야매' 성형술이 문제

실리콘 유방성형 부작용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미국 연방법원에서 내려지면서, 남몰래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적잖다. 이에 현재 유방 성형에서 사용되는 실리콘겔을 비롯한 보형물에 관해 네오성형외과 김성욱 원장의 도움말로 알아본다.

실리콘= 실리콘은 규소와 탄소를 고온에서 처리하여 만든 화합물이다. 액체, 겔, 혹은 고무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 실리콘고무, 피부용 로션, 비누, 음식물, 껌 등등 여러가지 생활 용품에 첨가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의학용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인체에는 코와 유방에 주로 사용된다.

실리콘으로 인한 부작용= 실리콘 부작용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근거는 없다. 최근 의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실리콘 보형물은 전신적인 질환이나 암을 유발하지 않으며 모유 수유에 영향이 없고 태아에게도 안전하다. 다만 보형물이 파열되면서 국소적인 합병증을 부를 수 있다.

부작용을 줄이려면= 반드시 전문가에게 수술을 의뢰하라. ‘야매’로 하는 성형에 공업용 실리콘 등 불법 보형물이 많이 사용돼 후유증이 크다. 일단 부작용이 생겼다면 담당의사에 문의해 보형물을 교체하거나 제거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추가적인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최근 사용되는 보형물= 유방성형에 사용되는 보형물은 식염수 보형물(saline implant)과 실리콘 겔 보형물(silicone gel implant) 이 대표적이다. 식염수 보형물은 실리콘으로 된 외피 속에 식염수를 넣은 것이고 실리콘 겔 보형물은 실리콘 외피 속에 실리콘 겔이 들어있는 것이다. 실리콘겔 보형물은 미국 FDA에서는 안전성에 대한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라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된다.

최근에는 시술 후에 가슴 크기를 원하는 대로 저절할 수 있는 더블루멘 실리콘백도 쓰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보형물은 안정성 및 효과에 대한 임상 실험을 철저히 거쳐 부작용이 현저히 낮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3/02/04 11:10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