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목숨 걸고 지갑 지킨 까닭

내가 아는 여자 연예인 A는 술만 마시면 영락없이 필름이 끊기는 고약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 보기에는 술이 센 편도 아닌데 워낙 분위기를 잘 타는 성격때문인지 술만 들어가면 자제라는 단어를 아예 잊어버린다. 여기서 멈추고 그만 마셔야지 하는 브레이크가 없으니까 어느 순간 필름이 확 끊겨버리는 것이다.

엉큼한 남자들이 들으면 꼭 한번 같이 술을 마셔 보고싶은 여자로 꼽히겠지만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은 여간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다. 스트레스도 풀고 기분 좋자고 마시는 술자리의 막판은 거의 시체수준으로 정신을 잃은 그녀를 안전하게 귀가 시키는 걸로 끝나게 마련이다.

친구들은 몸도 못 가누는 그녀를 집 앞에 던져두고 초인종만 누른 채 도망쳐버리는 수준이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며 빠른 발과 놀라운 순발력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고 자랑인지 하소연인지 늘어놓았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우리 아니면 그녀 인생은 옛날에 끝장났을 거예요. 술 취해서 정신도 못차리는 애, 귀찮다고 그냥 가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어디 먼데 섬으로 팔려가서 아침에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 들으면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고요, 정말 나쁜 놈 만나서 몸 뺏기고, 돈 뜯기고…. 우리한테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니까요.”

술 취해서 아차 하는 사이에 호된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위험에 노출되는 건 그녀보다 남자들이 더 많다.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아는 ‘아리랑 치기’ 라는 게 있다. 도대체 날치기이자 노상 강도인 이 범죄에 어떤 유래에서 애닲은 한민족 정서의 상징인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붙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술 취해서 정신이 없는 사람의 지갑 등을 슬쩍 하는 게 아리랑 치기의 핵심이다.

어두운 골목이나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드문 지하철 안 등이 아리랑 치기의 주된 무대이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부축해서 도와주는 척 하며 지갑을 빼 내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 정말이지 맘만 먹으면 누구라도 이 범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만큼 쉬운 범죄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흉폭하다던가, 잔인하다는 성격 대신 치사하다는 범죄성격이 더 맞을 것이다.

개그 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이란 코너에서 이장 역할로 유명했던 개그맨 김준호도 아리랑 치기를 당할 뻔 했다. 연습이 끝나고 동료들과 술을 걸친 김준호는 제대로 취해서 비틀비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지만 순전히 본능에 의해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는데 두 명이 그런 김준호를 탁 막아섰다.

처음엔 사리판단이 제대로 안되던 김준호는 두 명의 괴한이 자신을 죽 둘러싸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상황이 파악됐다. 놀라고 당황한 것은 물론이었다. 아마 골목이 어둡고 주변의 상황을 점검하느라 바빴던 두 명의 괴한은 김준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지갑이 들어있던 뒷주머니에 손을 대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하며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솟았는지 완강하게 저항을 했다. 정말이지 술기운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괴력이었다.

몸도 크지않고 싸움 실력도 별로인 김준호는 뒷주머니의 지갑을 지키기위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죽을 힘을 다해 괴한에게 저항을 했고(아마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던 광란의 몸짓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결국엔 괴한들이 더 당황을 해서 그냥 도망을 치더라는, 생생한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야, 너 그러다 걔들이 흉기라도 사용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차라리 지갑을 줘 버리고말지...... 요새 돈도 꽤 벌잖아?”동료 개그맨들이 걱정 반 핀잔 반으로 말하자 김준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속삭였다.

“나도 지갑째 주고싶었지. 그런데 지갑에 달랑 이천원만 있었단 말이야. 걔들이 지갑을 가져가서 뒤져보면 방송국 신분증 보고 내가 개그맨 김준호라는거 다 알텐데. 그래도 얼굴도 팔리고 인기도 있는 놈이 지갑에 달랑 이천원만 있는 거 알면 얼마나 우습게 알겠어? 인터넷에 소문이라도 내면 그런 창피가 어딨어? 그래서 내가 죽기살기로 지갑을 지킬 수 밖에 없었지. 나도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

입력시간 2003/02/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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