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시대] 변방에서 약속의 땅으로…

행정수도 이전, 고속철도 개통, 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부푼 꿈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우리나라 도시를 생각나는 대로 읊으라면 열에 아홉은 비슷한 순서다.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혹은 그동안 ‘대접’을 받은 순으로 보나 지역의 서열은 분명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혹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로 시작하는 대학의 서열 만큼이나. 혹자는 서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 때문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연고주의가 빚어낸 산물이라고도 해석했다.

헌데 2003년, 심상찮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월말 출범할 노무현 정부의 지방 분권화 정책을 등에 업고 지역 사회 곳곳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인근에 행정 수도가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대전 지역 주민들은 한껏 부풀어있고, 송도 신도시를 필두로 경제자유구역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인천은 ‘동북아시아 관문’을 자신한다.

또 아산 신도시를 아우르는 범 천안권 주민들은 연말 고속철도 개통에 의기양양해 하며 “우리 지역도 수도권”임을 외쳐대고 있다. 지방 분권화가 이뤄지기는 하는 것인지, 또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분명한 사실은 ‘넘버 3’에 만족해야 했던 지역들이 변화의 물결과 함께 ‘넘버 2’, 아니 ‘넘버 1’을 넘보며 대반란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간 지역 서열 상단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던 지역들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이 같은 변화에 우려하고, 또 분노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들 지역에서는 “새 정권의 역차별”이라는 공격적인 발언도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바야흐로 지역 사회의 오랜 권력 질서가 재편의 회오리를 맞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의 중심을 꿈꾸는 대전

“2004년 상반기 행정수도 이전 예정지 지정, 2005년 도시 설계와 부지 조성에 따른 용지 보상, 2007년 부지 조성 작업 착수, 2010년 정부 부처 입주 시작…”

혹시 공약(空約)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충청권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월5일 대전 국정토론회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구체적 일정표를 내놓았다.

“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저지될 경우 이를 돌파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도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도 덧붙었다. 임기(2008년2월)가 끝나기 전에 부지 조성에 들어감으로써 혹시 정권이 바뀌더라도 행정 수도 이전이 백지화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현재 행정수도 후보지로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곳은 계룡 신도시와 3군 사령부가 자리잡은 논산 지구, 박정희 대통령 시절 수도 이전지로 낙점했던 공주시 장기면과 충남 연기군 일대, 그리고 충북 청원군 오송ㆍ오창 과학단지 등지다. 논산 지구야 대전 서남부권과 맞닿는 곳이니 사실상 대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고, 장기-연기 지구 역시 대전 서북부 쪽으로 승용차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지척이다.

대전에서 그나마 가장 멀다는 오송ㆍ오창 과학단지도 이동시간 30~40분이면 거뜬한 대전 생활권이다. 또 다른 후보지로 거론되는 경부고속철도 천안역사 주변의 아산 신도시는 그러나 용수 부족 등 입지상의 불리로 낙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이 현실화하기만 하면 어느 곳이 됐든 대전이 최대 수혜 지역인 것은 불 본 듯하다는 얘기다.

행정수도 이전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각에서는 대전의 정부3청사를 예로 들며 “단순히 행정 기능만 이전될 뿐 별 다른 경제적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주변의 생활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기러기 아빠’ 신세를 자처하는 공무원들만 양산할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소수의 견해일 뿐, 청와대와 국회를 필두로 정부 부처가 모조리 이전할 경우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여타 기능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이전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박경 목원대 디지털경제학과 교수는 “행정수도 이전은 서울의 기능과 부가가치를 상당 부분 분산시킬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대전 지역 내부의 기대감은 이보다 훨씬 크다. 대전상공회의소 김남철 기업지원과장은 “정부 부처가 모조리 이전할 경우 대기업 본사, 금융기관 본점, 공공기관 등이 함께 내려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지금 당장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정부 부처의 이전이 일단 본격화되면 경제적 파급 효과가 대단히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 이전이 이뤄지면 우리나라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입지 상으로나 기능 상으로나 명실상부한 전국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昺? 섞인 말도 덧붙였다.


인천, 제2의 개항을 꿈꾸다

‘넘버 1’ 도시가 되겠다는 인천의 야심은 더욱 도발적이다. 이미 1800년대 후반, 한강과 서해가 접하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서구 열강들이 가장 많이 개항을 요구했던 곳이다.

조선 정부는 열강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인천의 개항만은 반대했지만 결국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돼 수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인천은 ‘한국의 관문’으로 인식돼 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인천은 ‘한국의 관문’에 만족하지 않고 ‘동북아의 관문’을 꿈꾼다. 기업들에 대한 각종 세제 혜택과 함께 외국인 학교와 병원 및 문화시설 등이 뒤따를 경제자유구역 1순위로는 송도 신도시와 영종ㆍ무의 지역이 꼽히고 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인천국제공항은 인천의 ‘하늘’을 책임지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게일사로부터 127억달러의 외자 유치에 성공, 송도 신도시 지역에 60층짜리 국제비즈니스센터를 건립키로 한 것은 고무적인 신호다.

영종-용유도 사이 바다 1,700만평을 메워 조성한 인천국제공항(에어포트ㆍAirport), 정보기술(IT)밸리를 지향하며 최첨단 정보화 도시가 조성되고 있는 송도 신도시(텔레포트ㆍTeleport), 서해안 최대 항구인 인천항(시포트ㆍSeaport) 등 이른바 ‘트라이포트(Tri-Port)’의 삼각 관문 형태로 도시를 재편하겠다는 인천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성큼 다가 와 있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늦어도 10년쯤 뒤면 부산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제 1의 개항’이 외세에 의한 타의적인 개항이었다면, 이제 인천은 지자체와 주민들이 한 마음이 돼 스스로 문호를 여는 ‘제 2의 개항’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대전이나 인천에 비길 바는 못돼지만 천안도 요즘 ‘뜨는 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연말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천안역사에서 서울 광명역사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분. 서울 내의 어지간한 지역간 이동 시간보다 짧다.

“이제는 천안 일대를 수도권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주민들의 자부가 결코 허풍이 아닌 셈이다. 게다가 아산 신도시 개발이 완료되면 천안 50만명, 구 아산 20만명, 아산 신도시 30만명 등 100만명의 주민을 아우르는 천안 광역시로 거듭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사뭇 팽배하다.


대구, 질서 재편에서 밀려나나

뜨는 곳이 있으면 지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지역 사회의 권력 질서 파괴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대표적인 곳이 TK(대구ㆍ경북) 세력의 근거지인 대구다.

대구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지역 경제의 양대 축인 주택건설업과 섬유업의 침체로 지역 내 총생산(GRDP)이 7년 연속 전국 최하위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전국 평균(3.0%)을 크게 웃도는 3.6%에 달하는 등 좀처럼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터다.

1월말 노 당선자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기업인들이 “대구 지역에서 당선자 지지 표가 가장 적어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지역 개발이나 현안 사업을 추진하는 데 차별이 없이 해달라”는 건의를 한 데서도 불안한 민심이 충분히 읽힌다.

경제자유구역을 인천 부산 광양 등지로 한정한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역차별’을 운운하며 가장 서운함을 표시했던 곳 역시 대구 지역이었다.

“이전 정권에서 대구 지역이 마치 대단한 수혜를 받은 것처럼 알려졌지만 지금까지 발전의 축은 서해와 남해를 잇는 일자 지역이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이나 부산 항만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 투자는 사실상 지역 투자나 다름 없잖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역 투자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니 대구는 찬밥 신세일 수밖에요. 마찬가지로 동해안과 내륙 지역도 계속 소외 지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최삼룡 대구시 경제정책과장의 완곡한 표현 속에서도 불만이 잔뜩 묻어난다.

불만의 강도는 조금 덜하지만 광주나 포항 등지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밀려나지는 않을까 조바심이다. 광주는 그간 ‘국민의 정부’ 텃밭이라는 이점을 업고 광(光) 산업 등 각종 개발 전략을 추진할 복안이었으나 입지 등의 이유로 타 지역에 밀려나자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철강 도시, 첨단과학도시, 물류거점도시, 문화관광도시 등으로 ‘환동해 중심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던 포항도 낙담천만이다.

이 같은 서열 파괴가 지역 간 발전적 경쟁을 유도하는 순기능을 하게 될 지, 아니면 그야말로 역차별을 통한 또 다른 지역주의를 낳게 될 지 아직 단언하기는 이르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까지도 지방 분권을 한다고 하면서도 지방의 재정자립도가 기대치에 크게 못미치는 등 내용이 뒷받침되지 못한 만큼 지방 분권화라는 구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며 “현재 일고 있는 지역 질서의 변화는 향후 새 정부가 구체적 역점 사항을 어떻게 수립해 나가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2/14 10:21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