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북송금 파문, 어디까지] '북으로 간 돈' 해법 제각각

정치권, 정략 앞세운 첨예한 기싸움

현대상선의 2억달러 대북 송금문제로 정치권이 온통 시끌벅적하다. 정치적 해결을 바라는 여권에 대해 한나라당은 특검제 도입을 통한 실체적 진실규명을 주장하고 있으며, 자민련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크게는 여야가 특검제 도입을 놓고 맞서 있는 상황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청와대와 노무현 당선자 측,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조금씩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대선 패배이후 깊은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에게는 호재(好材)중의 호재로 다가왔다. 한 당직자는 “완전히 망해가는 빈집에 소떼가 들이닥친 격”이란 표현을 쓰며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당에 활기가 불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민련도 한나라당과 보조를 같이하며 안보우선 정당의 이미지를 새롭게 각인시킨다는 계획이다.

반면 청와대와 민주당, 노 당선자 측은 곤혹스런 나날 속에서도 은근히 책임의 화살을 다른 쪽으로 떠넘기려는 움직임이다. 청와대는 민감한 사안임을 감안해 줄기차게 정치적 해결을 원하고 있지만 노 당선자 진영에서는 청와대 해명 및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한화갑 대표 등 민주당 현 지도부는 청와대와 노 당선자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눈치만을 보고 있다.


청와대 “정치적 해결만이 상수(上手)”

청와대는 당초 여야 합의를 통한 정치적 해결을 강력 희망했지만 국민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은 상태에서 야당의 특검제 도입 주장 및 노 당선자 측의 양보 요구가 제기되자 당초 입장에서 한 보 정도 후퇴한 상태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 대통령이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측근들을 통한 비공개 증언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이 “반 국가단체와의 일은 초법적 행위”라며 해명요구를 거부한 것이 오히려 논란을 증폭시킨다는 판단아래 이 같은 양보안을 슬쩍 떠올린 것.

진상을 밝히라는 여론의 거센 압력을 일단 무마하면서 김 대통령이 직접 해명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사전에 피해 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에 따라 비록 야당이 거부하고는 있지만 비공개 증언 방침이 합의될 경우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와 박지원 비서실장 등이 나설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측은 비공개 증언을 통해 비밀지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면 어렵게나마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기대 속에 막후 대야(對野) 설득에 나서고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임동원 특보가 전모를 공개하고 대통령이 나중에 사과하는 방식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며 “이를 위해 대통령이 퇴임전 담화문 형식의 대국민 사과를 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특검제를 통한 대북문제 100% 공개는 여야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다”면서 “북한 송금액이 낱낱이 공개되면 북한 내부에서도 지출 내역을 놓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군부 등이 심각한 갈등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노 당선자 측 “청와대가 해결해야”

노 당선자 측은 그러나 현 상황에 대해 청와대의 잘못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가 해결을 위한 성의있는 자세로 나와야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못박고 있는 것. 즉 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민을 설득해야 국민여론과 야당 공세를 잠재울 수 있다는 해법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는 대북 문제가 현 정권의 원천적 책임임을 분명히 해 차기 정부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 한편으로는 최악의 경우 특검제 직행도 노 당선자 입장에서는 크게 불리할 게 없다는 계산도 하는 것 같다.

노 당선자는 “청와대와 국회가 모두 양보해야 하고 특히 국회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야당의 협조촉구 외에 기왕에 특검제를 하려면 새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진행되기를 바라는 뜻도 있다.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는 좀 더 노골적이다. 그는 “청와대가 대응을 잘못하고 있어 이 상태대로라면 특검제로 갈 수 밖에 없다”며 “한나라당 위에 국민이 있고 국회 위에 국민여론이 있으므로 국민이 (특검제를 못하게) 한나라당을 누를 수 있도록 청와대가 국민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국민설득의 타이밍을 놓쳐 특검제가 도입되면 그 책임은 청와대와 김 대통령의 몫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특검으로 갈 경우 논란이 계속되고 대북정책을 포함한 다른 개혁정책 추진에도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수도 있어 노 당선자 측은 청와대의 태도 변화를 통한 원만한 합의를 가장 바라는 상태다.


엉거주춤 민주당 특검제 거부 되풀이

민주당 지도부의 입장이 가장 난감하다. 친정격인 청와대 입장을 고려 안 할 수도 없고 노 당선자 눈치도 살펴야 하는데 한나라당의 공세는 계속 수위를 높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갑 대표는 7일 국회대표연설에서 여야가 참여하는 국회 차원의 대북정책 협의기구 설치를 제안했다. 그는 “간곡한 심정으로 한나라당에 초당적 협력을 요청한다”며 “진실을 밝히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적정 수준에서 진상을 밝혀야 하는 여론도 있으니 국회에서 여야가 머리를 맞대보자”고 애원하듯 말했다.

정균환 총무도 “남북관계는 특수성이 있고 비리사건도 아닌 만큼 국회가 당사자를 불러서 상임위에서 구체적으로 답변하도록 하면 된다”며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과 임동원 특보는 운영위, 김보현 국정원 3차장은 정보위, 현대 관계자는 정무위에 출석시켜 증언을 듣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 “그래도 풀리지 않을 때는 어떤 방법이 적합한 지를 그때 가서 고민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라며 야당의 ‘협조’를 구했지만 한나라당의 강경입장은 좀체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민주당의 이런 엉거주춤한 움직임이 한나라당의 전의에 기름을 붓고 있는 양상이다.


한나라당, ‘一擧三得’ 격인 호재

외부의 비난 여론과 안으로는 개혁소장파 그룹인 ‘국민속으로’의 변화 요구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온 한나라당 지도부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이 ‘일거삼득(一擧三得)’ 격인 호재다. 여론반전의 계기도 되거니와 내부의 잡음도 일정부분 줄어들게 되면서 노 당선자 측을 우회적으로 표적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나라당은 박희태 대표 권한대행의 7일 국회 연설을 포함, 연일 ‘특검제 도입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강력 주장하고 있다. 박 권한대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특검제로 가야 한다”고 전제한 뒤 “대통령의 고백 및 사과와 특검제를 통한 진실 규명은 연계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게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못박았다. 김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도 특검은 양보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 한나라당은 여권에 의해 제시된 ‘비공개 증언을 통한 해법안’과 “청와대와 국회가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는 노 당선자의 의견도 일소에 부쳤다. 이규택 총무는 “고름이 가득 찬 종기를 수술하지 않고 덮고 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하면서 특검제 도입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한나라당은 나아가 이번 문제에 대한 과녁을 현 정권에서 노 당선자 측으로 확대 겨냥하고 있다. 김영일 사무총장은 “?당선자가 엄정 수사의지를 밝혀놓고도 청와대와 현대, 북한과 입맞추기에 나선다면 그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특검 수용을 강력 촉구하고 있다.

김 총장은 이어 “노 당선자가 이런 태도를 유지하면 현대 비자금 의혹과 대북 뒷거래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라며 “새 정부가 출범 전부터 부패의 멍에를 쓰지 않으려면 초심으로 돌아가 특검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검이 불발에 그칠 경우 그 책임을 노 당선자에게 묻겠다는 뜻이다.

여권 공세에 고삐를 바짝 조이면서 내부적으로는 이탈 조짐을 보이는 ‘국민속으로’ 등에 대한 집안단속 효과도 가질 수 있어 한나라당은 강경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이 특검제 도입에 계속 반대할 경우 17일이나 25일 본회의에서 특검법안의 단독 처리도 불사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이번 사건은 국익이 아니라 김 대통령의 사익과 정권안보차원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라는 주장을 앞세우면서 여론조사 결과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여 강경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자민련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도 7일 서울 한 호텔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비밀지원 사건과 관련,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이적행위”라며 김대중 대통령의 사법 처리를 주장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2/17 11:30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