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네트워크의 함정

개인적인 습관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에 접속한 상태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해서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고, 책에서 거론되는 그림이나 지도를 인터넷에서 확인하곤 한다.

1월 25일 토요일 오후 2시 40분 경에 인터넷 접속이 중단되었다. 요청한 문서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혹시, 바이러스? 통신망의 장애? 윈도우를 다시 깔거나 아니면 하드 포맷을 해야 하나?

인터넷이 안 되자, 일종의 조건반사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옮겨 다니던 채널이 YTN에서 멈추었다. 화면 3분의 1 크기의 커다란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전국 인터넷 마비!” 한국전산원의 도메인 네임 서버(DNS:도메인 네임을 IP주소로 전환시켜 주는 시스템)에 장애가 생긴 것 같다는 짧은 설명이 덧붙여졌다. 다른 공중파 방송들은 놀랍게도 간단한 자막조차 내보내고 있지 않았다.

시청률에 대한 전략적인 고려였을까. 아니면 주말의 평온함을 깨트리지 않으려는 배려였을까. 이유를 몰라서 답답해 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는 허접한 뉴스도 잘만 내보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었다. 인터넷 비즈니스와 관련된 상황이 아니라면, 실생활에서 인터넷 마비 사태는 정전이나 단수와 같은 불편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인터넷 불통 사태는 일상적인 불편함과 그 성질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함으로써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적인 고독과 불안을 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 보자. 왜 ‘불편’하지 않고 ‘불안’한가. 우리가 ‘좁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67년 하버드 대학의 스탠리 밀그램 교수는 160명을 무작위로 뽑아 메사추세츠 주에 사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실험을 했다. 160통의 편지 중에서 42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놀랍게도 평균 경유 횟수는 5.5명에 불과했다.

또한 알버트 바라바시 교수와 정하웅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98년의 인터넷 표본 조사 결과 ‘나’의 웹페이지에서 특정 주제의 홈페이지까지는 19번 클릭 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한다.

6명만 거치면 어떤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여섯 단계 분리’의 법칙이나, 19번만 클릭하면 원하는 인터넷 문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조사결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촘촘하게 연결된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세계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실체(nod)들은 상호연결(link)되어 하나의 연쇄구조(network)를 형성한다. 그리고 네트워크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체적으로 진화해 가면서 개별적인 실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가 네트워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불통과 관련된 네티즌들의 불안은 단순히 습관이나 중독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네트워크와 링크(link)되어 있는 우리의 존재론적인 불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좁은 세계는 얼마나 안정적인가. 네트워크 과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바라바시에 의하면, 네트워크의 세계는 견고하면서도 취약하다. 상호 연계된 좁은 세계에서의 연쇄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이다.

나비가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바다를 건너 거대한 폭풍우가 된다는 ‘나비 효과’ 이론과 흡사하다. 평범한 학원강사의 제안이 유력한 인터넷 언론을 허브(hub:링크가 집중되어 있는 홈페이지)로 활용하면서 수만 명이 모이는 광화문의 촛불 시위로 이어질 수 있다.

그와 동시에 2000년 2월 7일 야후(Yahoo)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검색 엔진들을 다운시켰던 ‘마피아보이’(Mafiaboy)처럼 초보적인 해킹 툴(tool:조작도구)만으로도 네트워크의 거대한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거미줄과도 같은 네트워크가 빠르고 효율적일수록, 파괴적인 도미노 효과 역시 짧은 시간에 광범한 피해를 낳는다. 전국적이든 국지적이든 유사한 사태는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네트워크되어 있는가에 대한 검토와 반성이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바라바시의 지적처럼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유연성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잡한 이름의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네트워크이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3/02/19 14:0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