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방의경(下)

내쉬빌은 전국에서 무작정 상경 팀들이 모여들며 대학가 포크 싱어 송라이터들의 둥지로 자리잡았다. 어느 날 인기가수 조영남이 무대에 서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내쉬빌은 인기를 위해 활동한 대중 가수들을 거부했던 자존심이 있었다.

방의경은 이곳의 '두목'으로 불리었고 '방의경 아워'가 있는 날이면 관객을 선별해 입장시킬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평론가 이백천은 내쉬빌에 대적하기 위해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를 열었다. 그녀는 "배고픈 음악후배들을 위해 가끔 르시랑스에서 개런티를 받고 노래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방의경은 청개구리 첫 공연과 김민기의 첫 개인 연주회에 찬조 출연하며 활발한 노래 활동을 펼쳤다.

1971년 말 기독교 방송 PD 김진성과 평론가 최경식이 제작한 김민기의 독집음반을 접한 내쉬빌 세 주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자극을 받은 이들은 내쉬빌의 음악을 남기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자고 했다.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각각 녹음을 했다.

당시 방의경은 기타 세션을 자청한 미8군 기타리스트 그레그와 함께 '불나무'를 녹음했다. 내쉬빌 주인들은 수원 시민회관에서 '우리들'이라는 3일간의 역사적인 포크 공연을 기획했다. 방의경은 첫날 공연에 참여했다.

500장 한정 본으로 발매된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노래-유니버샬,1972'은 이때의 음원이 담겨진 소중한 음반이다. 두 차례에 걸쳐 재발매된 이 음반은 김민기의 독집 음반과 더불어 한국 포크 사에 중요한 명반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방의경은 72년 4월 청개구리에서 개인 리사이틀을 필두로 맷돌공연에도 특별게스트로 몇 차례 참여했다. 이후 김진성 PD의 6개월 간 설득 끝에 기독교방송 '세븐틴'의 DJ로 나섰다. 이때 게스트로 나온 보성고 3학년 김의철과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이후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어 인생과 음악적 인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4개월 남짓 짧았던 DJ생활을 그만두고 머리를 식힐 겸 시골로 여행을 다녀오자 성음제작소 나현구 사장이 음반 제작을 청해왔다.

그녀의 유일한 독집음반 <방의경 내노래 모음-유니버샬,1972년>은 포크 팬이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음반이다. 어두운 사회현실을 너무도 맑고 아름다운 은유적인 노랫말로 표현한 11곡은 피끓는 젊은 영혼들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단 한번일지라도 노래를 듣고 나면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이 당시 미8군 가수 장미리는 그녀의 노래에 매료된 동생 장은아를 데리고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가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녀의 노래 '불나무'는 암에 걸린 줄 알았던 환자에게 생명의 불씨를 지펴준 사연으로 포크 팬들 사이엔 유명하다.

박정철 회현동 R레코드 사장은 "방의경 독집 음반은 6년 전 음반 애호가들 사이에 존재유무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귀한 음반"이라고 전한다. 이 음반은 현재 200만원을 호가하며 가요 음반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방의경은 "독집은 녹음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재킷 사진도 레코드사에서 일방적으로 선정해 큰 애착이 없다"고 밝힌다. 독집 음반은 발매 즉시 방송과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시중 음반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그녀의 모든 음반은 칼로 그어져 폐기되었다. " '아름다운 것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노래가 금지됐어요. 데모하다 죽은 학생들의 삶이 슬퍼 지은 '하양나비'도 그렇고 '불나무'도 사전에 없는 말이라며 금지 곡이 되었어요"

어느 날 그녀의 이대 선배인 KBS 라디오 PD가 "펑크 낸 가수의 대타로 노래를 불러달라"며 연락이 왔다. 성질이 난 그녀는 남산의 ‘그곳’을 은유한 '검은 산'을 불러, 그 여파로 프로그램이 통째로 심의에 걸려 취소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감시의 눈길을 받았던 그녀는 홍보협회에 취직해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헬로 코리아'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다.

1974년엔 TBC '5시의 다이얼'의 DJ를 다시 맡았지만 억울한 이유로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DJ를 그만둔 어느 날, 이대부고 동창의 형이었던 장충동 스튜디오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2집 녹음에 들어갔다. 자정을 넘어 통금이 되자 문을 잠그고 비밀리에 밤샘 녹음을 했다.

이때 녹음한 ‘하양나비’, ‘마른 풀’, ‘검은 산’등 30여 곡은 시대의 아픔에 분노하고 슬픔을 어루만진 방의경 음악의 진수였지만 마스터 음원이 분실되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귀한 우리 문화를 경시하고 미국화 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가 싫어 1976년 결혼 후 이민을 떠났다. "미국 땅에서 문화대결을 해보자"는 의욕으로 떠났지만 이민 초기 뉴욕에서 액세서리 물품 보따리 장사를 하며 숱한 고생과 좌절을 겪었다.

1980년 초에는 LA로 건너갔다. 세계적인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그녀가 만든 벨트를 차고 TV에 출연할 정도로 성공을 했지만 84년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1994년 장신구 사업관계로 18년 만에 귀국해 후배 양희은과 함께 KBS 2TV '심야에의 초대'에 출연했다.

방의경은 2002년 초 인터넷 사이트 '윈드버드'에 자신의 게시판이 생겼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그해 11월 다시 귀국한 것은 잊어버렸던 노래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많은 팬들을 확인하곤 감동했다.

그녀는 꽃피우기도 전에 가슴속에 묻어둔 자기 음악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군사정권에 의해 생매장되고 거세된 그녀의 모든 노래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환생하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2/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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