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당당하지 못한 관치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산업은행 정건용 총재는 스스로를 ‘관치금융의 화신’이라고 부른다. 물론 자신을 폄하하는 발언은 아니다.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관치는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4,000억원 불법 대출 의혹 사건의 책임을 바로 밑에서 그를 보좌하던 박상배 부총재에게 떠넘겼다. 청와대가 2월 14일 대북송금 의혹에 대해 대 국민 해명에 나선 직후 “당시 대출이 명백한 법규 위반이기 때문에 박 부총재에 대해 재정경제부에 해임 제청을 하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이다.

감사원도 산업은행 감사 뒤 징계 요청 없이 박 부총재의 인사 자료 정도로만 사용하라고 했던 터였다. 배경은 둘 중 하나다. 당시(2000년 6월) 최종 결재권자(여신 담당 이사)였던 박 부총재가 순전히 판단 착오로 혹은 의도를 갖고 스스로 대출을 해줬다고 확신했든지, 아니면 뒤탈이 생긴 관치금융 사건은 반드시 ‘윗선’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든지.

산업은행 현직 총재쯤 되는 인사가 전자처럼 순진한 발상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말이다.

정 총재와 청와대 사이에 모종의 조율이 있었던 것일까. 청와대는 앞서 대북송금 의혹을 해명하면서 정작 이번 사태의 발단이자 핵심 사안인 산업은행 불법 대출 의혹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을 통해 2억달러의 환전 편의를 제공해 준 것 외에 정부가 개입한 것은 전혀 없었다는 투였다.

결국 특검제가 도입되거나 검찰이 수사에 나서기 전까지는 현대상선에 4,0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 준 책임은 고스란히 박 부총재가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어지간한 국민이라면 안다. 4,000억원이나 되는 거액 자금에 대해 윗선의 압력 없이 국책은행의 일개 여신 담당 이사가 대출 결정을 내렸을 리는 없다는 것을.

박 부총재는 지난달 산은 세미나에서 만찬 도중 일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입으로 누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냥 짊어지고 가는 거지. 검찰이 수사를 하면 모든 게 드러나겠지만 이걸 파헤쳐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언제까지 ‘몸통’을 보호하기 위해 ‘깃털’만 희생양이 돼야 하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관치가 계속 될 것인가.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2/25 11:20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