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한국 지성사의 위대한 철학적 논쟁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이황 기대승 지음/김영두 옮김/소나무 펴냄

1558년 조선 명종 13년 10월, 과거를 보러 온 한 젊은이가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국립대학 총장)을 찾아갔다. 젊은이는 이 자리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펼치면서 대학자와 철학적 논쟁을 처음 시작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고등고시 응시자가 서울대 총장과 학문 토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젊은이는 32세의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ㆍ1527~1572)이고, 대학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ㆍ1501~1570)이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다.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 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 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고봉) 서로에게 존경을 가득 담은 두 사람의 편지 쓰기는 이렇게 첫 대면 후 곧바로 시작돼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100여통의 편지는 안부편지이기도 했고, 자기와 세상을 되돌아보는 성찰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편지들은 그 자체가 학술 논문이었고, 한국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논쟁에 다름 아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의 최대 학술적 이슈였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사색하고 토론했다. 퇴계는 고봉에게서 철학적 사유에 대한 신선한 관점을 보충 받았고, 고봉은 퇴계에게서 학문과 인생의 깊이를 전수 받았다.

조선의 성리학이 이후 심성론(心性論) 분야에서 중국의 성리학을 뛰어넘으면서 독특한 학풍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 두 사람의 학문적 우정 덕분이다.

퇴계와 고봉. 두 사람의 편지는 오랜 세월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우리들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편지는 지금까지 거의 접근 불가능한 지역에 방치돼 왔다. 이전까지 퇴계와 고봉에 관한 번역서는 거의 국한문 혼용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한글 세대들이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다.

지은이 김영두는 오랜 한학 공부를 통해 쌓은 탄탄한 기초와 탁월한 우리말 구사 능력을 통해 고전을 자신의 문체 속에서 새롭게 풀어 냈다. 한글 세대가 새롭게 읽고 우리말로 다시 생각하면서 고전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최성욱 기자

입력시간 2003/02/26 11:46


최성욱 feel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