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김영은, 홍정현

바야흐로 졸업 시즌이다. 졸업이란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예정된 다음 단계를 밟아가는 이들에게는 희망찬 출발의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어둡고 긴 터널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실업대란'. 학교 문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다. 상반기 취업전망은 '아주 흐림'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취업이 높은 벽 앞에 주저앉는 이가 어디 한 둘이고, 남녀가 따로 있으랴마는 여성 구직자들의 아픔은 더 크다. '그래도 여자들은 취집(취직삼아 시잡?)이라는 차선책이라도 있지!' 하는 남성 구직자 우선 구제 분위기 때문이다.


하루 200콜은 자기 도전

스물살에 첫 아이를 낳고, 아이가 돌이 되면서부타 일을 시작한 김영은(28·동원캐피탈 근무)씨. 두 아이의 엄마이지만 이미 전문 고객 상담자로 자신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시아버님이 마흔셋에 얻은 첫 아들이 바로 제 남편인데, 어릴때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먼저 결혼부터…'를 하시는 시아버님 성화에 덜컥 결혼을 했는데, 그래도 아이를 낳을 때 외에는 일을 놓은 적이 없어요. 스물 한 살때 처음 시작한 일이 화장품 회사에서의 고객 상담이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비슷해요. 전화로 대출금에 대한 이자가 체불되거나 연체된 고객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미리미리 알려주고 더 이상 연체되거나 해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도록 독려하는 일이지요."

고객의 입출금 내역과 신상정보를 바탕으로 적절한 타이밍을 예측하여 전화로 고객의 신용상태를 점검해야 하는 채권관리 업무는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고객이 몇 날, 몇 시까지 입금을 약속했는데, 정작 그 시간에 입금이 되지 않을때 정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요. 입금 예정 시간이 되면 컴퓨터에서 알람이 울리면서 약속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떠요. 이때 즉각 입금이 안되면 바로 경계경보가 뜨고, 모든 금융권이 다 막혀요.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 알려줘야 하는게 업무니까. 벨이 울리면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죠."

이 같은 직업 특성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 한사람 힘들고 지친다고 멋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이게 정말 내 일일까 진지하게 고민할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격려를 합니다. 그렇게 버둥거리며 한 고비를 넘기고 버틸때마다 적어도 내가 채권 쪽에서는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죠. 한 몇년 더 상담 업무를 계속 하면 관리자가 되기 위한 연수의 길도 열리고, 차차 제 꿈에 한발짝씩 가까워지겠죠."

풍부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후배 실무자를 관리하는 자리에 올라 후배를 키우는 관리자가 되는게 김씨의목표. 이를 위해 오늘도 콜을 한다. "어떻게 보면 하루 200콜이란 다름아닌 자기 도전이에요"


전문비서 되기 위한 징검다리

전공인 유아교육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자신의 새로운 커리어를 개척해 나가고 있는 (23·듀오정보(주) 회원관리팀)씨는 현재 근무 중인 회사에서 회원관리를 하고 있다.

"어린이 집에 실습을 나갔는데, 정말 저와는 너무 맞지 않는 일이라 걸 알았어요. 바로 그만 두고 KTF, LG등에서 고객 상담업무를 하다가 인재파견회사에 제 이력서를 넣으면서 새로운 일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저희 회사 Matching 시스템인 DMS 시스템에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의 프로필과 사진들을 정리하는 게 주 업무예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미팅을 주선하게 되는 거니까 굉장히 까다로울 때도 많아요."

숫자 하나, 직업 코드 하나라도 잘못 기재하면 당연히 바로 클레임이 걸린다. 또 서류만으로 짝 지워지는 시스템 상 어쩔수 없는데도 상대를 만나본 후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클레임을 걸어올때는 담당자로서 신경이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외뤈 분들의 연령 대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해요. 또 직업도 각양각색이고. 그러니 정말 온갖 종류의 사람을 다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일정 경비를 지출하고 회원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에 맞는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고, 저희는 서비스를 할 의무가 있죠. 그런데 가끔은 지나치게 자기 지위를 과시하면서 정도에 넘치는 서비스를 요구해오는 분들이 있어요. 스트레스가 엄청 쌓일 수 밖에 없지요."

수많은 고객들을 만나는 동안 홍씨는 사람을 평가하는 그녀의 눈을 꽤 예리하게 다듬었다. "이제는 얼굴만 보면 대략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그래도 저는 이 일이 현재로서는 마음에 들고, 이걸 징검다리의 하나로 삼아 다음 징검다리로 건너갈 거예요." 홍씨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전문비서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유급 실습이라고 여긴다. 보수 받으며 경험도 쌓고, 동시에 비서자격시험 준비에 영어회화 공부도 겸하고 있따.

"일 하면서 힘든 건 그래도 견딜 수 있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제가 힘들어 저 자신을 놓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거예요. 최소하루 30~50건에서, 시즌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회원 데이터를 안고 살다 보면 자기계발에 투여할 시간이 부족해요. 2달 전 부모님으로로부터 독립했어요. 제가 버는 돈만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웃음) 결혼 정보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결혼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요. 여러 면에서 홀로서기 연습이 필요해요."

홍씨는 자신앞에 놓인 시간이 엄청난 부피임을 잘 안다 그러기에 다음 목표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남자 친구가 있기는 해요. 그렇지만 (결혼까지 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 스스로 독립하는 쪽이 훨씬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인력파견 회사를 통한 '틈새 구직 작전'

김영은씨나 홍정현씨가 찾은 것은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다. 이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은 '어디에 다니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임을 알고 있다.

"사실 인문계 고교 졸업자들은 학교 문을 나서눈 순간 막막할 거예요. 일자리는 필요한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잖아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저처럼 인재파견회사가 꼭 필요하다 싶어요."(홍정현) "맞아요, 저 역시 회사에 근무하면서 다른 직장을 찾기 어려워 인재파견회사를 통해 재게 맞는 일을 찾았죠."(김영은)

직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어요. 하다못해 인터넷 포털사이트마다 취업정보를 갖고 있어요. 이력서에 사진만 올려놓으면 연락이 와요. 그만큼 인력을 찾는 곳도 많다는 얘기죠."(김영은)

"다들 대기업이나 폼 나는데 가려고 너무 애를 써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인력을 구하는 업체는 많은데 말이죠. 이름 있는 회사, 명예 같은 것에 너무 메이다보니 그런 것 같아요. 첫 직장은 목표를 향해 내딛는 첫 징검다리일 뿐이예요."(홍정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여한 얘기지만 거푸 취업에 실패하면서도 눈높이는 결코 낮추지 않는 이들이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될 충언으로 여겨졌다.

입력시간 2003/02/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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