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정치인생 접는 DJ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김대중(金大中)'

반 세기를 조금 넘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DJ처럼 줄곧 주연급 대열에서 있던 인물이 또 있을까. 건국에서 군사독재, 민주화에서 경제 재도약 시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도 그의 발자취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말 그대로 정치사의 산증인이요 역사적인 인물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40대의 첫 대권주자에서 유신정권의 최대 정젹, 사형수에서 미국으로이 망명, 대권 4수만에 만들어 낸 최초의 호남정권 및 정권교체, 첫 노벨상 수상에서 남북정상회담 성사 등….

그의 이력을 들어다 보는 것이 곧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압축해 조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DJ가 정치판을 떠났다. 1961년 첫 금배지를 단 이후 필생의 꿈이자 지역 주민의 한(恨)스런 염원을 소화해 낸 '국민의 정부' 마지막 날은 청와대에서 보내고 동교도 사저로 조용히 돌아왔다.

유신정권과 5공화국에서는 타의에 의해 정계를 떠났고, YS 정권 출범때는 스스로 물러나 있던 그였지만 16대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지금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런 퇴장을 맞이했다.


DJ, 국내외 강연 및 저술활동에 나설 듯

김 전 대통령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당분간 푹 쉰 다음 할 일을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대북 비밀 송금 사건이 처리되는 방향에 따라 휴식 시간이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다는게 대쳊거인 관측이다.

휴식 기간이 끝나면 노벨상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강연 및 저술활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한 측근은 "세계 유수의 대학, 연구기관 등 40여 곳으로부터 이미 면담 또는 강연 요청이 들어와 있다"고 전했다.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방침이나 한반도도 평화 정착을 위해 북한 핵문제 해결 과정등에서 새 정부를 도울 생각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활동을 위해 연세대에 기증한 아태 평화재단에 별도의 집무실이 마련될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성공한 퇴직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활동을 염두에 둔 듯하다.

부인 이희호 여사도 그간 힘써왔던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활동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사회활동가로 여성운동가로서의 영부인 이전의 위치에서 다시 활동할 계획이다.

'대통령'이란 시기어린 비난을 받았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은 영원한 'DJ맨'으로 남을 전망이다. 그는 동교동 사저 근처에 사무실을 얻어놓고 DJ의 야당 총재 시절부터 계속해 온 아침 문안을 시작을 하루 일과를 여는 최측극 비서역할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는 "정치입문 후 12~13년간 DJ곁에서 한번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나뿐" 이라며 "김전 대통령이 시키는 일도 하고, 만날 사람도 만나며 보좌하면서 개인 활동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밖에 임동원 이기호 특보 등은 회고록 집필에 몰두키로 했으며, 최초의 청와대 여성 대변인인 박선숙씨는 당분간 휴식을 취한 뒤 진로를 결정할 예정이다. 김 전 대통령 공식 비서관에는 1급에 김한정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2급 비서관에는 김형민 제1부속실 국장과 윤철구 관저 비서가 활동하게 된다.


국민의 정부, 절반의 성과과 실패

국민의 정부는 IMF체제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속에 출범해 단기간만에 투자 적격등급 회복 및 외환보유국 세계 4위국으로 급성장시키는 등 경제적 성과를 일궈냈다. 부문별로 공과 논란은 있겠지만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합격점 수준에 도달했다.

우선 IMF 지원자금 195억달러를 당초 계획보다 3년 가량 앞당긴 2001년 8월 전액 상환했다. 98년 마이너스 6.7%에 달했던 경제성장률도 99년 10.9%, 2001년 3% 대 등 빠른 속도로 회복됐으며, 경상수지도 98년 404억 달러, 99년 245억달러,2001년 86억 달러 흑자 등 5년 연속흑자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99년 6.3%, 2000년 4.1%, 2001년 3.7% 등 해마다 떨어졌다. 특히 IT(정보기술) 산업의 GDP(국내총생산) 비중이 연평균 20%씩 성장, 'IT강국'으로서의 면모도 갖췄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데는 총 157조원의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투입돼 국민부담 가중에 따른 논란이 일었고, 2002년6월말까지 총 631개 부실 금융기관이 합병, 계약이전, 파산 등으로 정리되면서 일시적 대량실업의 고통이 수반됐다.

정치분야에서는 소수 여당이 한계 속에 거대 야당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상생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념지향이 다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불안한 '동거'는 여권내 갈등과 인사 난맥상, 한나라당의 강도 높은 대여투쟁으로 이어졌다.

비록 남북정상회담 성사와 김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경사도 있었지만 잇단 게이트 사건 등 권력형 비리의혹으로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2001년 의약분업과 각종 게이트, 언론사 세무조사, 임동원 전 통일장관 해임건의안 표결과정에서의 'DJP공조'붕괴등으로 레임덕에 접어 들었고, 그 해 11월엔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모태인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16대 대선이 치러진 2002년 국민경선으로 노무현 대통형이 화려하게 등장하고 국민이 월드컵 4강 신화에 열광하는 사이 김 전 대통령의 두 아들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소되는 일도 있었다.

또 인사정책에서도 호남출신의 우위기조가 유지돼 영남을 비롯, 타 지역의 배타적인 감정이 증폭됐다.


햇볕정책의 功過는?

국민의 정부 최대 성과로 꼽히는 남북문제에서는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금강산 관광길 개척과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이라는 긍정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98년 6월의 속초 앞바다 북한 잠수정 발견과 묵호 무장간첩 침투사건, 99년 6월의 서해교전 사태까지 발생해 '햇볕정책'의 지속적 추진여부를 둘러싸고 심각한 국론 분열 양상이 나타났다. 이같은 논란은 급기야 '대북송금' 파문으로 이어져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 논란거리로 남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에 앞서 "남북문제에 있어 나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며서 고통을 각오했다"며 "햇볕정책이 다 성공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남북 긴장완화, 경제발전, 북한사회의 변화, 북한 경제로의 진출 등의 성과도 있었다"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속에서 (나를) 평가할 것"이란 말로 지난 임기를 회고했다.

과연 DJ는 성공한 대통령일까, 실패한 대통령일까? 이분법적 사고로 DJ와 국민의 정부를 설명할 수 는 없지만 첫 정권교체를 이루고, 노벨상을 수상한 민주화 세력의 중심 인물이 한 시대를 풍미한 뒤 아름답게 퇴장하고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한 네티즌의 글이 가슴에 와 닿은다. "DJ의 과오까지도 지지하거나 찬양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를 부당하게 매도하거나 내모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겠다. 멀어져 가는 거인의 뒷모습을 배웅해 드리고 싶다"('거인의 퇴임식'에서).

입력시간 2003/03/0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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