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화국] 침묵은 금이 아니다!

참여정부, '토론 공화국'표방… 토론문화 급속한 확산

"첫째, 어떤 의견이 침묵을 강요 당하는 경우, 그 의견이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 둘째, 침묵을 강요 당하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도 진리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진리의 나머지 부분이 보충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충돌됨으로써 부여되는 것이다.

셋째, 일반에게 널리 인정되는 진리라 해도 논쟁이 허용되지 않고 실제 논쟁도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것이 합리적인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넷째로는, 자유로운 토론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진리는 그 의견이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영향력을 빼앗길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로운'에서 민주적 토론이 고전적 정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쉽게 풀자면, 토론은 '좀 더 나은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월터 리프먼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 역시 토론을 통해서만 지켜지고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서구 사회에서 토론은 민주주의 실천하는 핵심적인 도구였다.

"나와 새로 일하게 된 분들의 경우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효율적인 국정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토론을 활성화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 공화국'을 포방하고 나서면서 전국이 토론 열풍에 휩싸였다. 3월9일 열렸던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대화는 많은 비판과 질타 속에서도 이런 열풍을 확대 재상산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정부 부처는 물론 기업들도 상명하달 식 의사결정 과정에서 벗어나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앞 다퉈 나섰고, 서점가에는 토론 기법과 화술을 다룬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관련 학원이나 인터넷 카페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늦기는 했지만, 참여 정부란 캐치프레이즈를 등에 업고 우리나라에도 서구의 토론 문화가 비로소 자리를 잡는 것일까.

헌데, 역풍도 거세다. "이대로 가다가는 토론 중독증에 빠지고 말 겁니다. 과거 구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에서는 지도자들이 하루 종일 회의를 열고 토론을 벌였지만 아무런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하고 붕괴의 운명을 맞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든 토론하겠다

'토론의 달인' 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노무현 대통령의 토론 습관은 부산에서 활동하던 재야 변호사 시절 몸에 배였다고 한다. 무료 변론 사건 하나를 두고 동료였던 문재인 변호사(현 청와대 민정수석)와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기가 일쑤였다.

"토론을 통해 얻어진 결론이 언제나 혼자 내린 결론보다는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고 인수위 출신 한 인사는 전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전국에 생중계된 국민과의 TV 토론회를 한 차례 가졌고, 여·야 총무와의 회담, 야당 당사 방문, 국회의장 면담에 이어 취임 이후에는 급기야 인사에 불만을 품은 평검사들과 공개 토론회까지 여는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토론하겠다는 기세다.

참여정부의 달라진 토론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3월4일 노 대통령 주재로 처음 열린 국무회의, 장장 3시간 동안 이어진 국무회의는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였다. 한 참석자는 이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이쪽에서 한 마디 하면 이에 질세라 다른쪽에서 한 마디하고, 이견을 내면 곧 바로 반론이 나왔다."

특히 대구 지하철 참사를 둘러싼 토론에는 관련 부처가 따로 없었다. 이창동 문화부장관이 "내가 대구출신인데 고향에 갔더니 1980년 광주에 버금갈 만한 공황상태나 마찬가지더라"고 먼저 입을 열자 권기홍 노동부장관을 비롯해 10여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미확인 시신 등에 대해 민심이 좋지 않다" "중앙에서의 결정이 신속히 이뤄지고 즉각 대응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호흡기 환자는 항구적으로 치료를 해줘야 한다"…. 저마다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이승만 정부 이후 국무회의 사상 10분간 휴식을 가진 것은 이 날이 처음"일 정도였다.


공무원은 지금 토론 중

정부 부처의 모습도 이전과는 확 달라졌다. 산업자원부는 3월15일~16일 장관이하 과장급 이상 간부 100명 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중소기업진흥공단 연수원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신임 윤직신 장관이 국무회의와 국정 토론회에 참석한 뒤 '토론행정'을 중앙 부처에도 접목시켜 보겠다며 제안한 것.'참여정부의 국정철학과 지역균형발전의 과제' '차세대 성장 주력 산업의 발굴'등의 주제애 대해 전문가들의 발표를 들은 뒤 참석자들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

22~23일에는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KOTRA, 수출보험공사등 산하기관 간부를 대상으로 2차 워크숍을 열 예정이다.

서울지방국세청은 2월부터 간부 회의방식을 토론 및 세미나 형태로 변경했다. 간부가 지시하면 부하 직원이 보고하느 형태에서 벗어나 주제를 정해 직원들이 발표를 한 뒤 토론을 벌이는 식. 보건복지부도 3월초 경기도 공무원수련회에서 과장급 이상 간부와 외부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명복지 실천전략 모색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남해 군수를 지낸 김두관 행자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직원과 장관이 복도에 서서 격의 없는 토론을 벌여야 한다"며 권위를 타파한 '복도 토론'을 예고했다. 한 직원은 "요즘은 부서에서 올린 안건 하나하나 의견을 되물어 보는 바람에 시간이 상당히 길어졌다"고 했다.


토론하는 기업만이 산다

민간 기업들도 앞을 다퉈 토론 문화를 도입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는 최근 '회의실(Conference Room)'이란 용어를 전면 폐지하고 '토론방(Discussion Room)'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사적 캠페인인 '토론 문화 혁신 운동'의 일환. 참석 전 토론 내용을 준비할 것. 토론 주재자는 조언자 역할만 할 것. 비판하지 말 것. 끝장을 볼 것 등 성공적인 토론을 위한 10계명까지 제정했다.

삼성에버랜드 피재만 상무는 "업무 자체가 젊고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상의하달 식 회의 문화로는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 토론 문화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삼성SDS는 올해 초 취임한 김 인사장이 '젊은 SDS 만들기'를 표방하면서 최고경영자와 직원들간의 직접적인 대화와 토론문화 활성화에 나섰다. 김 사장은 매주 금요일 임직원들과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사내 현안 등에 토론을 벌이고, 월요일에는 전 직원에게 'CEO의 월요편지'를 보내고 있다.

이외에 LG화학은 사내인트라넷에 'CEO와의 대화방'을 개설해 놓고 문답식 토론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견그룹인 대아그룹은 최근 성완종 그룹 회장이 신입사원들과 함께 격의 없는 토론 자리를 갖기도 했다.


토론 관련 상품도 각광

서점가에도 토론은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토론을 잘 하지 못하면 더 이상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토론 관련 상품을 찾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는 것.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는 최근 '화법'에 관한 책들로만 모아둔 코너를 설치했다.

'말 잘하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아이디북) '대중화술의 비결'(영언) '말버릇이 성공을 좌우한다'(도서출판 홍) '듣는 기술, 말하는 기술'(오늘의 책)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화술'(시아출판사) '토론의 방법'(커뮤니케이션북스)….

화법이나 토론 관련 책의 종류만 수십종에 달한다. CNN '래리 킹 라이브'의 진행자 래리 킹이 쓴 '래리 킹, 대화의 법칙'(청년정신)은 2001년 6월 초판 1쇄가 나온 후 1년6개월만에 벌써 13쇄가 발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이후 사회적으로 토론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화술이나 토론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화술이나 화법에 관련한 책을 찾는 독자들이 크게 늘었다. 특히 올들어 관련서적 출간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 여직원의 설명이다.

최근엔 토론 비법 등을 가르치는 학원이나 토론 실력을 키우기 위한 이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 까지 호황을 누리고 있다.


토론 중독증 사회(?)

하지만 '토론 공화국'의 폐패를 경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숱한 토론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자칫 탁상공론에만 빠지거나 토론을 위한 토론에 그치는 등의 치명적인 약점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은 내부 반발을 최소화하는 등 긍정적인 것이 사실이자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속한 의사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까지 토론의 방식이 동원돼 서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팽팽히 맞선다면 업무가 마비될 지도 모릅니다." 한 경제 부처 고위 관계자는 '토론 지상주의' '토론 중독증'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지켜본 국민이 "계속 똑 같은 주장만 되풀이 하는게 무슨 토론이냐" "대통령이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검사들을 윽박지르려면 무엇때문에 이런 자리를 만들었느냐"는 비판이 쏟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고려대 행정학과 염재호 교순느 "민주주의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토론 문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 토론으로 문제를 풀겠다고 해서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 변론술과 입신 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가르쳤던 이들을 '소피스트'라 불렸다.

원래 '현인' '지자'를 의미했던 이 이름은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각종 궤변을 늘어놓는 이들의 무리라는 의미로 변질됐다. 그래서 그들는 '궤변학파'로로 불렸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안을 풀어나가는 건전한 민주 정부가 될 것인지. 아니면 궤변 정부로 전략할 것인지. 참여정부느 ㄴ그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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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3/03/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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