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맞은 동교동계, 거사(?)에 나서나

민주당 구주류 극력반발, 신주류와 기싸움

노무현 대통령의 특검제 수용 방침이후 동교동계를 비롯한 민주당 구 주류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12ㆍ19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사실상의 반노(反盧) 행보로 가뜩이나 신 주류 측으로부터 개혁대상으로 몰리고 있던 터다.

한화갑 전 대표가 밀려나듯 사퇴했고, 정균환 총무는 야당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다. 또 이윤수 의원은 검찰 수사망에 올라 있고 구 주류 측의 지역구에 신 주류 인사들이 도전장을 낼 것이란 말들이 공공연히 떠도는 상황이다.

이렇듯 코너에 몰릴 대로 몰려 있는 상태에서 노 대통령이 당 지도부까지 나서서 만류했던 특검제를 선뜻 수용하고 나서자 동교동계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주군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위는 물론 본인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자칫 집단행동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실제 특검이 진행되면 김 전 대통령과 최측근들은 물론,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이를 기화로 신 주류 측의 압박은 더해질 것이고 이 경우 민주당을 지탱해온 구 주류 전체가 구 정치의 소산으로 취급받으며 아예 ‘팽’ 당할 가능성마저 있다.

신 주류 측의 한 인사는 “동교동계의 반발은 친 DJ 및 호남 민심을 의식한 일시적 제스처일 가능성이 있다”고 애써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구 주류 측은 의원 총회나 당무회의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한 발언을 서슴지않는 등 반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들의 반발 이면에는 노 대통령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호남 민심이 특검제 수용 방침이후 관망세로 돌아선 부분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심기 불편한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후 동교동 사저로 돌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간 외출 한 번 안하고 거의 칩거 상태인 것으로 전해진다. 외부활동이 전무하니까 건강악화설과 함께 휠체어에 의존할 때도 있다는 얘기마저 나돈다. 그의 실제 근황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게 없지만 동교동을 방문한 측근들에 따르면 특검제 공포 이후 더욱 심기가 좋지 않아졌다는 것에는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한 측근은 “이제까지 특검법 처리문제와 관련, (청와대와 김 전 대통령 간에) 일절 상의가 없었다”며 “왜 그렇게 일 처리를 하는지 참 이해가 안 된다. 고심은 했겠지만 이 문제를 보는 기본 인식이 다른 것 같다”고 밝혔다.

이 측근은 한 발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이나 새 정부의 핵심들이 주도적으로 ‘특검법 드라이브’를 거는 것을 두고 “뭔가 정치적 복선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내비치고 있다.

특검법 수용 방침이 발표된 이후 김 전 대통령 자택에는 전윤철 신국환 임인택 김동태 김명자씨 등 전 정권의 각료들이 대거 다녀갔다. 전직 장관들은 “문안인사 드리러 갔다”고 언급하면서 “특검법과 관련한 현 정치상황에 관해서는 일절 얘기가 없었다”고 전했다.

신 전 장관은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니까 김 전 대통령이 그에 대해 토막토막 짧게 말씀하시더라”며 “마음의 부담이 될까봐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얘기를 간접적으로 종합해 보더라도 김 전 대통령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것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포함돼 있는 듯 하다.

이를 의식한 듯 민주당 신 주류인 이상수 사무총장은 3월23일 특검에서의 김 전 대통령 조사 방법과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면 최대한 예우를 다한다는 의미에서 서면조사도 가능하다고 본다”며 “전직 대통령에게 큰 부담은 주지 않으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조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호남 주민을 비롯한 DJ 지지자들은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면서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가득하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권한대행 등과의 오찬에서 “대북 자금조성 문제는 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까지 가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몰라도 박지원 임동원씨 등 핵심 측근들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진행하겠다는 말이다. 동교동계의 불만의 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구 주류 측 당내 반발 고조 예상

민주당내에서는 특검제 협상을 주도한 정대철 대표와 이상수 사무총장, 김원기 고문 등 신 주류 지도부에 대해 원성이 높다. 지도부 책임론을 거론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일부 의원들은 아예 노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동교동계의 중심 격인 한화갑 전 대표는 “당이 단합해야 할 때”라는 원칙론을 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새어 나오고 있다.

동교동계 핵심인 김옥두 의원은 “원칙과 소신을 지킨다고 한 대통령이 야당의 날치기 통과 법안을 그대로 수용해 공포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의원 총회에서 국익을 고려해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당론을 정했는데도 개인적으로 플레이한 사람들이 있다”고 청와대와 당을 싸잡아 비판했다.

김상현 의원은 “대통령이 집권당을 존중해야만 정치안정이 될 수 있다”고 했고, 박상천 의원도 “여야 합의가 안된 상태에서 공포한 것은 잘못이다”고 못박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상수 사무총장은 “지금은 책임론 거론보다는 갈등 분위기를 화해 분위기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민주주의가 원래 시끄러운 것이므로 약간의 갈등이 있지만 치유될 것”이란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당의 전통적 지지 정서를 외면하기 힘든 신 주류로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놓고 구 주류를 몰아세울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매우 고민하고 있다. 신 주류의 신기남 의원마저 “대통령이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을 존중하자”며 나서고 있지만 파문은 쉽게 진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 구 주류측의 한 인사는 “이제 당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할 것”이라며 “개혁안이고 뭐고 다 물 건너 간 것 아니냐”고 불만을 표출했다.

민주당은 지금 원내총장과 사무총무 체제?

정균환 총무는 특검제 수용 발표 이후 한동안 당무를 거부한 채 당사에 출근 조차 하지 않았다. 원내총무 라인 대신 사무총장 라인이 실질적인 대야 협상 창구로 가동돼 그 결과가 한나라당의 판정승 쪽으로 굳어진 데 따른 불만 표출이었다.

침묵시위를 벌이던 그는 5일만에 의원총회에 참석, “이번 특검제 처리를 보면서 절차와 결과, 배경 등 모두에 대해 당혹감과 불쾌감을 금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나라당이 나를 특검법 반대 강경론자로 몰아가고 있는 만큼 추가 협상이 지지부진하면 모든 책임을 내게 돌릴 것 아니냐”며 “앞으로 협상은 대표와 총장이 나서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의총에서의 발언 도중 “(정치생활 중) 이처럼 치욕스런 때가 없었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 총무가 대야 협상 역할을 포기하자 한나라당은 “민주당은 ‘사무총무’와 ‘원내총장’ 체제냐”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대치 중이던 신ㆍ구 주류간 신경전은 노 대통령의 386 핵심 참모인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의 발언으로 인해 전면전 양상으로 확대됐다. 안 부소장은 3월20일 “노 대통령은 호남의 일반 국민에게는 무한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지만 호남의 지역민심을 부추기는 정치인에게는 부채의식이 없다”며 “특검법을 수용했다는 이유로 노 대통령이 DJ를 배신했다고 선동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행동”이라고 동교동계 중심의 구 주류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또 “지금 DJ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반발하고 있는 그들은 과거 DJ가 일부 보수 언론과 외롭게 싸울 때 방관하며 타협하자고 했던 사람들로 아주 파렴치하다”며 “그들은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기득권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안 부소장의 발언에 발끈한 민주당 실ㆍ국장 10여명은 이튿날 “정치경험이 일천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사적인 견해를 남발해 당의 민주적 공론과정을 훼손하고 당의 분열을 부추겼다”며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반격했다.

실ㆍ국장들은 “대북송금 특별법 문제는 국익과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일 뿐 민주당 신ㆍ구 주류간의 계파적 이해관계로 치부될 사안이 아니며, 야당이 날치기 처리한 특검법을 당이 반대한 것은 오랜기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싸워온 당의 정책적 정체성에 바탕한 것이지, 특정 지역민과 특정인을 고려한 것이 결코 아니다”고 주장했다.

동교동계 이훈평 의원도 “안모씨인가 이름은 들어봤는데 뭐 하는 사람이냐”며 “나도 과거 실세라는 소리를 들어봤지만 실세는 아침에 이슬을 맞은 나팔꽃과 같아서 이슬만 마르면 나팔꽃은 끝”이라고 공박했다.


동교동계의 앞날은 어디로…

당내에서는 신 주류에 밀려 서자취급을 받고 있는 데다 후단협 출신 의원들은 한 치 앞도 예단키 어려운 벼랑끝 신세이다. 특검제로 인한 일부 핵심인사의 사법처리 얘기가 나돌고 있으며 김 전 대통령도 조사대상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풍전등화 같은 동교동계로서는 믿을 것은 오직 호남지역 주민들의 민심 뿐이다.

노 정권 출범이후 그간의 ‘여서야동(與西野東)’의 획일적인 민심 분포도는 일정 부분 허물어지는 양상이 감지된다. 하지만 민주당 구 주류측은 “아직 영남 민심이 오는 징조는 뚜렷하지 않은데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앞으로 뭘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은근히 호남 민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광주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는 “호남에서는 노 대통령이 민주주의 정통성을 이어가고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타파하는 데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대통령이 호남을 소홀히 한 것 아니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도 일부 있는 게 사실”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아직 DJ에 대한 애정을 지울 수 없는데 노 대통령의 특검법 공포는 지나치게 영남 민심만 고려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물론 신 주류 측은 “새 정부는 과거와 같은 지역구도에서 탈피해 민주=호남당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맞서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뿌리깊은 지역정서를 한번에 바꾸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노 정권 출범이후 추풍낙엽처럼 밀려만 가던 동교동계 의원들이 최근 다시 목소리를 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특검제를 통한 전 정권 청산작업이 강도 높게 진행될 경우 호남지역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로 DJ 적자들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것이란 계산이다.

지역 민심을 등에 업고 벌이는 신ㆍ구 주류간 줄다리기는 내년 총선 때까지 계속될 전망인데 어느 한쪽으로 힘이 몰릴 경우 팽팽한 줄이 끊어지면서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2003/04/01 11:14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