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life] 약선식 전문가 정세채씨 밥상

"선식은 요란하지 않은 입의 호사""

전국의 산천과 사찰을 돌며 역대 고승들의 수행법과 그들의 선식에 관한 비밀을 연구한 이가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해 왔던 그 경이로운 선식의 비밀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산사에 가면 특별한 식단이 있다’의 저자인 정세채(46)씨는 약선식 전문가다. 현재 ‘정세채 음식환경 연구소’를 운영하며 일반인들이 선식의 이로움을 알고 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충남 보령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3 시절, 긴급조치를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했다. 그 때 당대의 석학인 심양 황호성 선생을 만나게 됐고, 그의 문하에서 13년 간 지리, 의학, 역학, 천문, 그리고 조선상고사 등을 공부했다. 이후 뒤늦게 미국의 켄싱턴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다소 엉뚱하게도 약선식 연구가가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종로구 통인동에 위치한 그의 연구소를 찾아 대뜸 물어 보았다.

“어떻게 약선식을 연구하시게 되었나요?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습니까?”“딱히 언제라고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 어릴 때 철새들은 나는데 왜 우리집 닭들은 날지 못하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집에서 기르는 닭들에게 철새들이 먹는 음식을 준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야생의 힘이 돌아 왔던지 높은 담장을 뛰어 넘어 달아나 버리더라구요. 그 때부터 먹는 음식이 사람의 체질과 성품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어요.”


머리 맑아지고 기억력 쫗아져

어릴 때의 그 같은 경험 뿐 아니라 그가 본격적으로 약선식에 빠져 들게 된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인생에서 큰 위기를 맞았어요, 8년 전에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분노 때문에 몸에 반신마비가 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부터 산사에 가서 적극적인 선식을 하게 됐습니다. 한 3년 정도 있었는데 오전 10시, 오후 5시 2끼를 죽식으로 하고 과일과 채소는 거의 먹지 않고 잣, 호두, 호박씨, 해바라기씨를 많이 먹었어요.”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선식을 하면 몸에 변화를 느낄 수가 있나요?”“물론 선식을 통해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다행이지만 더 놀라운 건 머리가 정말 맑아지고 기억력이 말할 수 없이 좋아지는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동창생들 이름이 다 기억날 만큼 말이죠. 복사하려고 서류를 들고 잠깐 훑어 보는 사이에 저절로 다 외워지는 바람에 저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란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는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거죠.”

약선식 전문가로 음식 재료의 물성에 관한 한 뛰어난 직관을 자랑하는 그의 밥상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위에 정갈한 자태로 모양을 드러낸 음식은 연한 풀빛과 연노랑, 자색이 은은하게 배합된 삼색 건강죽, 연근돗나물고추장무침, 새송이, 청경채된장볶음, 새송이와 산초, 참죽으로 만든 장아찌가 보는 이로 하여금 군침이 돌게 한다.

물에 불린 현미로 죽을 쑤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에 솔잎가루와 백년초가루, 복령가루를 각각 넣어 만들어 낸 삼색건강죽은 현미의 고소한 맛에 솔잎과 백년초, 복령의 향이 은은히 배어 있어 한 수저를 들고 나면 산사의 맑은 기운이 저절로 솟아날 것만 같다.

초록빛이 선명하도록 데쳐낸 청경채는 역시 살짝 데쳐내어 양념에 무친 새송이 버섯과 함께 둔다. 다시마 국물에 된장을 조금 풀고 여기에 청경채와 새송이, 홍고추를 넣고 참기름으로 마무리 해 놓았다. 입안에서 사각거리는 청경채의 신선함이 새송이의 쫄깃한 맛과 잘도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든다.

“연근을 고추장에 무쳐도 먹나 보죠?” 아이들이 연근을 좋아해 항상 연근졸임을 빠뜨리지 않는 필자는 살짝 데쳐 낸 연근을 고추장에 새콤하게 무쳐 낸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게다가 새송이, 산초, 참죽으로 만든 장아찌는 마늘, 무, 고추장아찌만 먹어 본 내게 입안의 호사스러움을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철학과 건강이 있는 선식마을 만들 것

그는 그렇다 치고 그의 가족들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사실 어찌보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렇게도 몸에 좋은 데 가족들에게 권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아침에는 주로 복령죽, 하수오죽, 깨죽을 기본으로 계절에 따라 다양한 죽을 먹어요. 낮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거나 과일 등 가급적이면 간단하게 먹고 있어요. 선식의 핵심인 소식을 실천하고 있는 거죠. 주말 점심 때는 느릅칼국수나 청국장 등 다양하게 해 먹어요. 아이들이 샐러드를 좋아하는데 제가 만든 여러 가지 조청으로 소스를 만들어 브로컬리, 사과, 파인애플을 넣고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 그 향이 기가 막히죠.”

소스 이야기가 나오자 한껏 신이 난 그는 곧바로 맛 좀 보라며 조청을 몇 가지 꺼내 놓았다. 일반적으로 조청이라 하면 쌀로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배로 만든 조청이었다. 이외에도 거의 모든 뿌리나 음식재료를 가지고 조청을 만들 수 있다며 구기자, 당귀, 하수오, 맥문동, 천문동, 도라지, 갈근, 매실 등 수도 없이 많은 조청을 만들어 보았다고 했다.

이들 조청들은 그 재료의 성분에 따라 효과가 다른데, 도라지조청은 기침에 좋고 갈근조청은 간경화나 숙취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용해 개발한 다양한 소스들은 마요네즈, 케찹 일변의 소스문화에 비해 훨씬 풍성하고 건강한 식단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먹는 음식은 소박(?)했지만 그의 꿈은 결코 소박하지 않았다. “철학이 있고 건강이 있는 그런 마을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각각의 특성에 맞는 주거 형태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그런 곳 말이죠. 황토방도 있고 토굴도 있고 질그릇가마도 있고. 음식은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선식이 제공되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맑게 가꿀 수 있는 그런 마을을 일구어 내는 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

정세채음식환경연구소 (www.Zenfood.or.kr) 02-733-1759

선식특강:매주 목요일 오후 2시

<삼색건강죽 만드는 법>

재료: 복령가루, 백년초가루, 솔잎가루 각10g씩, 현미찹쌀 각 100g씩, 소금

만드는 법:

1. 충분히 불린 현미찹쌀을 센 불에 팔팔 끊이다가 불을 약하게 해서 서서히 달인다.

2. 죽이 거의 다 되면 복령가루, 솔잎가루, 백년초가루를 각각 넣고 조금 더 끓인다.

3. 그릇에 담을 때 가장자리에 솔잎죽을 담고, 그 안쪽으로 백년초 죽을, 다시 복령죽을 담아 삼색으로 모양을 낸다.

< 환상적인 샐러드용 소스 만드는 법>

곡물이나 과일로 만든 식초와 조청, 청주를 4:1:1의 비율로 한 다음 요플레를 섞는다.

배현정기자

입력시간 2003/04/06 13:38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