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色을 아느냐] 감출것 없는 性, 섹스를 말하라

자녀들의 성적발달에 관심, 적절한 성교육 중요

부모들은 비록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자식만은 아무 탈없이 인생을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사랑을 해도 절대로 상처를 입지 않고 무사히 결혼까지 하기를 원한다.

부모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을 억압하고 감추기에 급급했지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꺼려왔다. 부모들은 성적인 문제에 관한 한 자식에게 매우 엄격하다. 혹시라도 섹스를 해서 상처받게 된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식이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면 자신과의 믿음을 저버렸다고 화부터 내게 된다. 그래서 자식들은 섹스를 두려워하고 또 이성과의 성관계를 숨기게 된다. 이렇게 성을 억압하고 감추려고만 하는 것은 화초에 벌레가 생길까 봐 아예 뽑아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뭐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와는 달리 성문제를 안이하게만 해결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화초는 살아있을 때만 그 가치가 있다. 살아있는 화초에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심과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물론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겠지만 화초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귀찮다고 무책임하게 뽑아버려 죽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에게 성욕을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라


자식에게 성욕을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라

성욕은 식욕과 같아서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한다고 식욕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억압한다고 해서 성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무리하게 성욕을 해결하려다 보면 타락하거나 기형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섹스를 모르는 상태에서 성적인 문제와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더 큰 문제를 만들 뿐이다.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제대로 성욕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하고 이성과의 사랑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서 그것이 인생의 값진 경험이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 대·소변 가리는 일을 부모로부터 배워왔다. 그런데 사정을 한다는 면에서 똑같은 배설행위인데도 섹스만은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보니 성적 충동을 느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참아야 하고 성욕을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모른다. 그저 본능이란 것에 맡겨놓고 당장은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성욕을 억제하는 것이 무조건 도덕적인가?


성욕을 억제하는 것이 무조건 도덕적인가?

본능이 도덕일 수는 없다. 본능이란 발정을 하면 삽입을 하고, 사정을 하고 나면 끝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행위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섹스를 단순히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동물적인 행위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런데도 성욕을 억제하면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하면 부도덕한 것으로 말해왔다.

하지만 본능적인 섹스로는 인간이 만족을 얻을 수가 없어 또 다른 타락을 야기하게 된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도덕적 가치관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불편하지 않게 끊임없이 바뀌어 오면서 발전해 왔다. 섹스 문제도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한 배설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해왔다.

섹스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가 있다. 여자는 음(陰)으로 남자는 양(陽)으로 설명하며 그 조화를 강조했다. 음과 양은 어느 한쪽이 강하거나 모자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존중할 줄 알 때 만들어진다.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알지 못하게 하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은밀하게 관계를 맺게 되고 섹스를 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둘 중 하나가 “이용을 당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자식은 자신의 성욕을 다루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부모라해도 그 일을 자신이 아닌 학교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주기를 바란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섹스를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성행위와 성적 쾌락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자식들에게 차마 섹스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섹스는 자연스런 음양의 조화이다


섹스는 자연스런 음양의 조화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과 같다. 섹스의 행위는 바로 나와 또 다른 내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르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또 다른 나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성욕만을 해결하겠다고 무책임하게 또 다른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섹스를 하기 전에 상대가 또 다른 나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진정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면 그것은 자석과도 같아서 서로를 끌어당기게 된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인간의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대신하는 일이 섹스인 것이다. 이런 성스러운 일을 하면서 왜 부끄러워한단 말인가? 물론 구약에 의하면 인간이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것도 원죄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섹스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섹스는 둘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그 음과 양의 생리를 잘 알아야 한다. 여자의 몸은 천천히 뜨거워지고 천천히 식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남자의 몸은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는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찬 성질의 음인 여자를 먼저 뜨겁게 만들어야 섹스의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남자의 몸이 쉽게 뜨거워지는 성질 때문에 일찍 사정하고 나면 여자는 그제서야 비로소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원리를 모르는 남자는 당황해하면서 여자의 성욕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자신감을 잃으면서 여자에 대한 성적 불신을 가지게 된다.

여자가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다. 그래서 여자를 자유롭게 만들면 성적으로 문란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글 중에도 백개의 눈을 가진 괴물이 한 여자를 지키지만 여자의 음탕함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음양의 조화를 몰라서 생겨난 우스꽝스러운 한편의 일화지만 사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아직도 많다. 바로 남자들이 여자를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자의 인격까지 무시하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성에 대한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여자의 성을 억압하지 않으면 성적으로 문란해진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제대로된 섹스를 가르쳐라


제대로 된 섹스를 가르쳐라

섹스를 감추려고 하면 이런 현상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떳떳하게 드러내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섹스를 잘 할 수 있는지 도와주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섹스를 드러내면 성적 상상을 하게 되어 오히려 성적 충동을 일으켜서 문제가 더 생길 거라고 말한다.

섹스를 드러낸다는 것이 마치 포르노를 공공장소에서 상영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히 성욕을 억제하려는 생각에 성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만을 강조해 왔다. 임신이나 성병같은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니 섹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부정적이다.

섹스에 대해 잘 알고 섹스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피임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혼자 만족하겠다고 무분별한 섹스를 해서 성병에 걸리는 일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평생을 함께 할 상대를 찾는 것이다. 비록 섹스를 했다해도 상대가 또 다른 내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면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섹스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이지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을 확인한 결과 평생을 함께 할 상대가 아닌데도 미적미적 시간만 끌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서로를 불행하게만 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이용하려는 섹스를 비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섹스를 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사랑을 상대의 몸이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섹스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 사랑을 상대의 몸이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상대의 몸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몸으로 사랑을 느끼면 사랑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섹스의 교육은 인격교육이다

이처럼 섹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랑법인지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식의 성적 발달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나이에 맞는 적절한 성교육을 해야 한다. 섹스는 언제 하느냐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하게 된다.

그렇다면 섹스는 한다는 것을 전제로 교육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들이 하니까 나도 섹스를 한다는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부모가 개입해서 자신을 존중하고 상대를 존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섹스의 교육은 인격 교육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섹스는 감추고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섹스를 보호한다는 것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행동해서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되는 것에서 자식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주고 조화를 이루며 섹스를 할 수 있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이 결혼을 해서 풍요롭게 사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서로 사랑하고 성적인 만족을 얻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는 만들어주어야 한다. 자식이 섹스를 몰라서 평생 불행하게 사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입력시간 2003/04/0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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