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소비심리] 시름 깊은 서민경제 "사는 게 전쟁이네"

실물경기 침체·물가폭등, 스태그플레이션 위기 '최악의 경제상황"

경제가 온통 잿빛이다. 이라크 전쟁과 북핵 위기로 실물 경기는 갈수록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고유가의 영향으로 물가까지 폭등세다.

최악의 경우, 올 하반기 우리 경제가 ‘저성장 속 고물가’를 의미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제기된다.

서민들의 시름도 갈수록 깊어진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가장들, 하루 아침에 회사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내몰려야 했던 노동자들, 자녀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술집에 나가야 했던 주부들…. 외환 위기 당시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군상들을 조만간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외환 위기 능가하는 경기자표

각 기관이 발표하는 경기 지표는 요즘이 외환 위기를 능가하는 최악의 상황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행이 전국 30개 도시 2,5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1ㆍ4분기 소비자동향지수(CSI)‘는 6개월 후 경기 전망을 나타내는 경기 전망에서 CSI 90으로 4분기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수치 상으로 2001년 3ㆍ4분기의 71 이후 최저치다.

기업들의 경기 전망도 컴컴한 터널 속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업종별 매출액 기준 6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4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90.2로 3월(109.0)보다 20포인트 가량 하락했다.

공장의 기계도 멈춰 섰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중소 제조업 1,500개사를 대상으로 설비 가동 상황을 조사한 결과 2월 평균 가동률은 69.9%를 기록했다. 1999년6월 69.7%를 기록한 이후 3년8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였다.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 붙었는데 물건이라고 많이 팔릴 리가 없다. 통계청의 ‘2월중 산업 활동 동향’에 따르면 도ㆍ산매 판매는 백화점 등 모든 업종에서 전반적인 부진을 면치 못하며 지난해 같은 달보다 1.8% 감소했다. 도ㆍ산매 판매 증감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외환 위기 당시인 98년12월(마이너스 3.6%) 이후 50개월 만이었다.

경기는 바닥인데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올해 3%대에서 물가를 잡겠다던 정부의 목표는 이미 사실상 물거품으로 돌아 갔다. 3월 소비자물가는 전달에 비해 1.2%,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4.5% 상승했다. 1~3월 누적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에 달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볼 때 이 추세가 연말까지 계속된다면 올해 물가상승률은 무려 9.6%에 이르게 될 거라는 의미다.

3월 물가를 추동한 것은 유가와 농산물 가격이었다. 석유류가 국제 유가 상승의 영향으로 전월 보다 1.7% 오른 것을 비롯해 농산물도 2월 기상 악화의 영향으로 2.5%나 상승했다.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하면 배추 값은 314%, 무 값은 226%, 양파 값은 181%나 폭등했다.

공공 요금도 서울시 등 수도권의 시내버스 요금이 8.2%, 전철 요금이 11.5% 인상되면서 평균 2.0% 상승했다. 상황은 어둡기만 하다. 국제 유가가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통상 1~2개월의 시차가 있는 만큼 4~5월 물가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스태그플레이션

인플레이션(고물가) 보다 심각한 것이 디플레이션(저성장)이고, 이 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 고물가)이라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현재의 국면을 스태그플레이션의 징후로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라고 진단하려면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물가도 10~20% 이상 폭등하는 국면이 1년 이상 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거듭해 온 우리나라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의 경험은 사실상 전무하다.

전문가들은 오일 쇼크로 휘청거렸던 80년과 외환 위기 초기였던 98년 정도를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가장 근접했던 때로 꼽는다. 80년에는 성장률이 마이너스 2.1%를 기록한 반면 물가가 28.7%나 치솟았고, 98년에는 마이너스 6.7% 성장에 7.5%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해 전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계속되고 유가 폭등으로 인한 물가 압박이 지속될 경우, 혹은 북핵 위기가 현실화해 한반도 위기가 고조될 경우 전례 없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LG경제연구원 김기승 상무는 “현 국면을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라고까지 진단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면서도 “경기 위축과 물가 상승이 최근 한국 경제에 아주 위협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깊이 패이는 서민 주름살

극심한 불황 속에 물가가 폭등하는 양상이 전개되면서 서민들의 주름도 갈수록 깊이 패이고 있다. 서울 성수동에 사는 주부 최모(42)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한 바탕 전쟁이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는데 남편의 월급은 2년째 제자리다.

한 때는 인근 사무실에 나가 파트 타임으로라도 일을 했지만 요즘은 그마저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가장 곤혹스러운 건 아이들의 학비다. 중학교 2학년인 딸 아이가 다니는 D학원 수강료는 지난해 18만8,000원이었지만 올해는 23만4,000원으로 25% 가량 올랐다. 참고서 가격도 최고 2배까지 뛰었다. A출판사 국어 참고서는 8,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영어는 9,000원에서 1만4,000원으로 인상됐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 아이의 학습지 비용도 지난해 4만5,000원에서 올해는 5만원으로 올랐다.

요즘엔 장을 보러 나가기도 겁이 난다. 최씨는 “아이들에게 튀김이나 해 줄 생각으로 양파를 사러 나갔다가 예전보다 가격이 두 배 가량이나 높아 빈 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여유 자금은 기껏해야 한 달에 20만원 남짓. 남편이 어쩌다 신용카드로 술값 계산이라도 하는 달에는 통장이 바닥이 나기 십상이다.

최근엔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려는 데 잔고가 없어 사용 정지가 돼 있어 망신만 당했다”며 투정을 부리는 남편과 한바탕 부부싸움도 했다. 최씨는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집을 팔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입지 않으며 아등바등 저축해 봐야 목돈을 만들 수 없는 현실도 서민들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 준다. 이자소득세 등 세금과 물가 상승률 등을 감안하면 대부분 저축성 상품의 실질 이자 소득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는 오래다.

그나마 연 5% 대를 유지해 온 정기적금과 주택부금 금리도 2월에는 각각 연 4.79%와 4.90%로 추락해 ‘4%대 금리’로 접어들었다. 정기예금(4.65% →4.46%)과 상호부금(4.82% →4.63%) 금리도 하락세가 지속됐다.

예컨대 금리가 연 4.46%인 1년 짜리 정기예금에 1억원을 넣었을 때 이자 소득 446만원에서 세금 16.5%(73만5,000원)을 제하면 372만5,000원을. 2월의 전년 동기 대비 물가상승률(3.9%)을 감안하면 17만5,000원을 손해 보는 셈이다.

그렇다고 조만간 금리가 오르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극도의 불황에 금리가 인상될 경우 경기 침체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융권 안팎에서는 경기 부양책으로 한국은행의 콜금리 인하론이 솔솔 고개를 들고 있는 형편이다. 이래 저래 2003년 4월은 서민들에게는 잔인한 봄이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3/04/10 13:51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