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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목줄 쥔 크레스트, 0.01%의 음모는?

SK 목줄 쥔 크레스트, 0.01%의 음모는?

경영권 방어 위한 SK자작극설, 지배구조 개선 계기 돼야

콰쾅, 콰콰콰쾅~.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 3월26일, 서울 여의도에 다국적군 크레스트의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SK를 향한 공습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강도가 미미했던 탓일까. 공개 리에, 그것도 포성까지 울리며 진행된 공습이었지만 심각한 상황이라고 눈치 챈 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소규모 공습은 연일 계속됐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쳤을 때는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4월4일, 크레스트는 6차례의 공습 끝에 SK 영토의 8.64%를 ‘접수’했다고 당당히 밝히고 나섰다. SK의 최대 영주로 떠오른 것이다. 여의도에 긴장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혹시 크레스트가 SK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크레스트는 추가 공세를 통해 SK 영토를 야금야금 파고 들었다. 12일까지 크레스트가 확보한 영토는 14.99%. 이 정도라면 가뜩이나 왕권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왕을 갈아 치울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SK가 지배하고 있는 인접 국가 SKT까지 왕권이 위협 받을 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언제 어느 순간에 SK측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영토를 되가져 가라고 협박하는 크레스트측의 녹색 편지(그린 메일)가 날아들 지도 모른다. 점령군이 된 크레스트측은 “왕권에 개입하지는 않겠다. 다만 합리적인 통치가 이뤄지도록 감시만 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말이다.

SK측은 포스코 등 우호적인 영주들에게 ‘백기사’가 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검토하고 나섰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과연 SK가 백기사 동원에 성공해 다국적군 크레스트를 물리 칠 수 있을 것인가.


일파만파 크레스트 공습

흥미진진한 무협 영화 한 편이 최근 개봉됐다. 제목은 ‘크레스트 SK 공습 작전’정도가 될까. 개봉된 지 불과 20일 남짓 지났지만 파장은 일파만파다. 경제계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영화의 결말을 두고 격론을 벌인다.

“결국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을 시도할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뭣 때문에 지분을 인수하겠어.” “아냐, 크레스트가 헤지 펀드라잖어. 경영진에 협박하는 그린 메일을 보내서 차익을 올리겠다는 심산일거야.” “포스코는 기꺼이 SK의 백기사가 돼 줄까? 아무리 그래도 수조원에 달하는 돈을 쉽게 투입할 수 있겠어?”

아직 결말을 속단하기는 이르다. 크레스트의 진의가 무엇인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SK측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영화는 어떤 결말을 그려 놓고 있는 것일까.


일단락된 SK㈜ 적대적 M&A 논란

SK㈜ 지분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4월4일 실체를 알 수 없는 크레스트 시큐러티스라는 해외 펀드가 장내에서 SK 지분 8.64%를 사들여 최대 주주로 떠오르면서부터 였다.

하지만 이 정도 지분으로는 SK㈜ 경영권을 확보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적대적 M&A 가능성은 “혹시나”하는 우려로만 제기됐다. 하지만 10일 크레스트가 추가 매입으로 지분을 12.39%까지 높인 것으로 확인되고, 불과 이틀 뒤인 12일에는 급기야 14.99%로 확대하면서 사태는 급진전했다.

크레스트측은 공시를 통해 수익 창출이 목표라고 밝혔지만, 이미 SK㈜가 경영권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지분을 훌쩍 넘어선 뒤였다. 정체가 여전히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크레스트는 조세 회피지역인 버진 아일랜드에 거점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헤지 펀드로 모나코 국적 자산운용회사인 소버린에셋매니지먼트사가 모회사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것은 정부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3일 “외국 동일인(크레스트) 지분이 10%를 넘어섰기 때문에 SK㈜는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분류돼 출자총액제한의 예외가 적용된다”는 공정거래법상 유권 해석을 내렸다.

SK측이 출자총액제한에 묶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7.6%의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에 10%의 자사주도 때에 따라서는 우호 세력에 매각, 경영권 방어에 동원할 수 있다는 SK측의 자신감도 덧붙여졌다. 다음날 크레스트 모회사인 소버린측도 보도 자료를 통해 “장기 투자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면서 SK㈜에 대한 적대적 M&A 논란은 정리 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다.


14.99%에 감춰진 음모

하지만 크레스트측이 인수한 ‘14.99%’라는 지분율에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SK㈜는 SK텔레콤(SKT)의 지분 20.85%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 주주. 문제는 크레스트가 SK㈜ 지분을 15% 이상 확보하면 전기통신사업법 상 SK㈜는 SKT의 ‘외국인 주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외국인 지분이 40% 가량인 SKT는 통신사업법상 외국인 지분이 49%를 넘을 수 없어 SK㈜는 보유 지분 중 9% 안팎에 대해서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SK그룹은 그간 SK㈜를 통해 장악해 온 SKT의 경영권이 흔들리게 된다. 크레스트는 이미 확보한 14.99%의 지분에 곧 “언제든지 0.01%를 더 사들일 수 있다”고 큰소리 치며 SK그룹의 SKT 경영권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를 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애당초 크레스트가 SKT에 대한 경영권 위협을 지렛대 삼아 SK를 압박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크레스트가 0.01%를 무기로 최대 계열사인 SKT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그린 메일’을 행사할 경우 SK그룹측은 무리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크레스트 보유 지분을 인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린 메일(green mail)’이란 공갈ㆍ협박을 의미하는 블랙메일(blackmail)이라는 용어와 미국 달러 지폐의 색깔인 그린(green)을 합성해 놓은 용어. 경영권을 위협할 만큼 지분을 매입한 뒤 경영진에게 프리미엄을 붙여 높은 가격에 지분을 되살 것을 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 외국계 펀드의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단언했다.

“장기 투자자의 특성은 수동적(passive)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크레스트의 행보는 공격적입니다. 정말 장기 투자를 할 생각이었다면 지분을 14.99%까지 끌어올릴 이유도 없었을 테고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적대적 M&A이거나 그린 메일이거나. 하지만 적대적 M&A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자금 동원력 등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그린 메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백기사가 나타날까

SKT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SK측은 ‘백기사(white knight)’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에 뾰족한 묘안이 있을 수 없다. 백기사란 경영권 방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우호적인 제3의 주주. 현재로선 SKT의 지분 6.84%를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가 가장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크레스트측의 추가 지분 매입으로 SK㈜의 SKT 의결권이 제한될 경우 포스코 지분을 백기사 지분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경영권 방어가 어렵기 때문에 SK㈜ 보유분 중 의결권이 상실된 지분(12% 가량)을 포스코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양측은 백기사 역할론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다. SK측은 “포스코에 백기사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고 공식 밝혔고, 포스코측도 “내부에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발을 뺐다.

양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는 SKT가 궁지에 몰릴 경우 백기사 역할론이 수면 위로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철강 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느낀 포스코측이 이동통신 사업에 눈독을 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코 주주들이 추가 지분 매입대금 1조5,000억원 가량의 지출에 선뜻 동의할 지는 불분명하다.


크레스트 백기사 설도 무성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크레스트가 SK의 백기사라는 설도 증권가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크레스트가 SK글로벌 사태로 위기를 맞은 SK㈜의 경영권을 돕기 위해 지분 매입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 마디로 최태원 회장의 구속 등으로 인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SK의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소문의 배경에는 우선 외국인이 최대 주주로 떠오르면서 SK글로벌 채권단의 회생 지원 요구를 물리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

채권단은 그간 SK㈜와 SKT 등에 출자 등의 방식으로 SK글로벌의 부실을 해소해 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크레스트측이 SK㈜에 대해 사업 재조정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을 요구하면서 SK글로벌과의 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게 됐다.

크레스트 지분 매입 이후 SK 그룹사의 주가가 일제히 동반 상승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크레스트측이 20일만에 평가 차익 600억원 이상을 거둔 것은 물론 전 계열사 주가가 폭등하면서 SK그룹 역시 톡톡히 실익을 챙겼다.

크레스트가 지분 매입을 14.99%에서 멈춘 것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크레스트 백기사 설’을 뒷받침한다. SKT 경영권을 위협하기 위해 0.01%를 남겨둔 것이 아니라 거꾸로 SKT에 대한 SK㈜의 지배력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SK측이 보인 태도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우선 공정거래법상 크레스트의 지분이 10%를 넘어가면 SK㈜의 지분이 출자총액제한의 예외로 인정돼 의결권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SK측은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아 ‘경영권 위기설’을 방관한 측면이 다분하다. 정체 불명의 외국인이 자사 지분을 10% 가까이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되도록 접촉 시도조차 하지 않다가 보름 만에 겨우 첫 접촉을 시도한 것도 역시 ‘크레스트 백기사 설’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엔딩에 대한 평가는?

극장에 불이 켜지고 엔딩 자막이 올라갈 즈음, 관객들은 이번 무협 영화에 대해 어떤 평을 내리게 될까.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볼 때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오락성 항목에는 기꺼이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성에는? 아마도 같이 관람한 이들과 영화가 던져 주는 의미에 대해 이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별의 개수를 헤아리지 않을까 싶다.

“크레스트가 SK 대주주가 된 것이 독일까, 약일까.” “글쎄, 국내 자본에게 외국 자본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아니야,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2003/04/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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