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에 오른 김정태 신화

합병비용 가중으로 통합 시너지 효과에도 먹구름

3월2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강당에서 열린 국민은행 정기 주주총회.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국민은행이 아니라 자회사인 국민카드였다. 공세의 선봉에는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섰다. 아예 작심을 하고 온 듯 했다.

“만약 이 자리에 국민카드 사람들이 나와 있다면 주주들 앞에서 죽을 죄를 졌다고 반성해야 합니다.” 김 행장은 “국민카드는 지난해 초 6,000억원의 이익을 내겠다고 하더니 결국 3,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올 들어서도 매달 1,000억원씩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며 “그 높은 연체율로 얼마나 많은 국민과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쳤느냐”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달랐다. 최고경영자(CEO)에게 주주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저 정도면 카드 부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심어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연신 찬사를 쏟아내던 예전과는 분명 달랐다. “김정태 행장 특유의 쇼맨십”이라는 냉소도 쏟아졌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국민은행의 카드 사업 부문 역시 연체율 상승으로 고전하고 있는 처지에 주주들이 보는 공개석상에서 자회사만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철저히 계산된 발언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화는 없다(?)

증권 맨에서 대형 시중은행장으로 거듭난 입지전적 인물,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 난 장사꾼, 국내에 ‘CEO 주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장본인…. ‘김정태’라는 이름 석자 앞에 붙는 수식어는 늘 화려했다. 옛 주택은행장 취임 직후 “월급은 1원만 받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그의 파격적인 행보 하나 하나가 모두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찌감치 극과 극으로 갈렸지만 대세는 늘 ‘찬 김정태 론’으로 귀결됐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순간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언제든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과단성과 개혁성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만의 장점으로 꼽혔다.

헌데 최근 들어 굳건할 것 같던 ‘김정태 신화’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6만원을 넘나들던 국민은행 주가는 3만원대로 추락해 ‘CEO 주가의 원조’라는 평가가 무색케 됐고, 지난해 4ㆍ4분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선 수익성은 좀처럼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합병 이후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직원들 간의 잡음도 끊이질 않고 있다. “더 이상 김정태는 없다”는 시장 일각의 극단적인 평가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것으로 치부한다 해도, 지금까지 그가 누려왔던 독보적 위치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내 최대 은행의 수장 김정태 행장의 신화는 과연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공룡 은행

국민은행에게 공룡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난해말 총자산은 213조8,000억원에 달한다. 시중은행 2위인 우리은행(101조1,000억원)을 두 배 이상 차이로 멀찌감치 따돌려 놓고 있다. 정규직 직원 수(1만8,347명 대 1만182명), 점포수(1,234개 대 655개) 등 규모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영향력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민은행이 대출 금리 인하를 결정하면 모든 시중은행들이 곧 따라 내릴 수밖에 없고, 예금 금리를 올리면 역시 그대로 쫓아갈 수밖에 없다. “은행 금리 결정권이 한국은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은행에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돌 정도다.

그런 국민은행이 지난해 4ㆍ4분기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분기 적자 규모가 무려 2,026억원이다. 신용카드와 가계대출 연체율이 급격히 증가해 직격탄을 맞은 결과였다. 이 같은 엄청난 분기 적자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년간 1조3,00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냈으니 어쩌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카드 문제와 더불어 SK 사태까지 겹치면서 올 들어서도 실적 개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증권사가 전망한 국민은행의 올 1ㆍ4분기 당기순이익은 918억원. 흑자로 돌아섰다고 안도하기에는 지난해 1ㆍ4분기(6,722억원)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수치였다. 2ㆍ4분기 전망 역시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한 애널리스트는 “국민카드에 대한 증자가 마무리되면 대손 상각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카드 문제에 따른 부담은 2분기가 최악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산적한 내부 현안

카드채 문제, SK 사태 등 은행권 공통의 악재로 인한 현상일 뿐인데 지나치게 국민은행의 실적만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헌데 국민은행의 내부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국민은행에 대해 가장 비우호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외국계 CLSA(크레디리요네)증권의 최근 코멘트를 살펴 보자. “연체율이 높은 카드 및 개인 대출 비중이 총 대출의 46%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 무수익 여신 비율이 카드 및 중소기업 대출의 부실로 연말까지 4.9%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국민카드 증자를 위한 지원금이 1조원에 달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국민카드와의 합병도 부채를 떠안는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이다.” 이 증권사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국민은행이 단기적으로 주가 상승 모멘텀을 찾기 힘들고 악재가 상존한다며 ‘매도’ 투자 의견을 냈다. 목표 주가도 최악의 상태를 보이고 있는 현 주가(18일 종가 기준 3만5,000원) 보다 무려 30% 가량 낮은 2만5,000원을 제시했다.

은행 공통의 악재 외에도 중소기업 대출 부실 가능성, 국민카드와의 합병에 따른 단기적 위험 가능성 등 개별 악재들을 안고 있다는 의미였다. 중소기업 대출의 경우 지난해 말 원화 대출 잔액 기준으로 36조6,000억원으로 1년 동안 무려 8조7,000억원이나 늘어났다.

부실 여신 비율 역시 은행권 평균을 훨씬 웃돌고 있다. 작년 말 현재 고정 이하 여신 비율은 2.9%로 은행권 평균 2.3% 보다 다소 높았고, 특히 요주의 이하 여신 비율은 7.5%로 은행권 평균(5.5%)을 크게 웃돌았다.

합병 이후 구조조정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등 비용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는 것도 국민은행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전산 통합 비용만 따지더라도 지난해 1년동안 직ㆍ간접적으로 5,000억원이 들었다.

이는 2001년 국민-주택 두 은행 전산 투자비용을 합친 액수(2,000억원)의 2.5배 규모에 달하는 수치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이렇게 혹평했다. “기업 합병 후 1년 내에 인원과 점포 등의 구조조정을 완료하느냐에 합병의 성패가 달렸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국민은행은 합병 후 1년6개월이 지났는데도 구조조정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는커녕 상당한 추가 비용만 부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규모가 크다는 것 외에 다른 장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죠.”


김정태를 향한 빗발치는 공세

‘스타 CEO’를 등에 업고 국민은행이 국내 은행권 ‘리딩 뱅크’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리라던 당초 예상을 깨고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CEO 김정태’에 대한 평가도 점차 냉혹해지고 있다.

“사실 옛 주택은행이 김정태 행장 부임 이후 승승 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국민주택기금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땅 짚고 헤엄을 친 격 아닙니까. 그 덕분에 엄청난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 차익도 챙겼고요.”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제 김정태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튀는 행보’을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월급 1원 + 스톡옵션’ , 인사 기록 폐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등 그가 보여온 행보의 대부분이 ‘보여주기 위한 행동’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20만주의 스톡옵션을 행사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김 행장은 5,000원에 인수한 스톡옵션을 6만198만원에 행사했고, 공교롭게도 그 이후 주가는 하락세로 돌아서 예의 장사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리증권 이승주 애널리스트는 “66억원에 달하는 차익을 불우 이웃 돕기에 사용한다고는 했지만 한 기업의 CEO가 아무런 예고 없이 스톡옵션을 행사한 것은 문제가 있다.

설사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CEO가 기업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만큼 스톡옵션 행사에 대해 소액 주주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국민은행이 시중은행 최초로 도입한 ‘신용회복 프로그램(개인 워크아웃)’도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국민은행이 어떤 정책을 도입하면 다른 은행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인 만큼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다. 국민은행이 앞장 서서 신용불량자 부채 탕감에 나서면서 고객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 측면이 많다”고 몰아 부쳤다.

심지어 다소 어눌한 말투, 촌스러운 복장 등 그가 보여온 모습 역시 철저한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인신공격성 얘기까지 들린다. ‘포스트 김정태’가 이끌 향후 국민은행에 대한 우려도 높다. 후임 행장이 들어서면 김 행장의 화려한 액션에 감춰져 있던 문제들이 하나 둘씩 불거질 것이라는 얘기다.

‘김정태 죽이기’를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극히 보수적인 은행권이 여전히 김 행장의 파격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측면이 적지않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증권 한정태 애널리스트는 “개인적인 평가야 어떻게 하는 김 행장이 국내 은행권에 세운 공은 분명히 인정을 해야 한다”며 “김 행장 같은 스타 CEO가 많이 등장해야 국내 금융도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은행권 입문 이후 어쩌면 최대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김정태 행장이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지 좀 더 지켜 볼 일이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4/30 15:58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