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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부산은 러시아 마피아의 앞마당

[르포] 부산은 러시아 마피아의 앞마당

부산 영도구 마피아 살해사건
러 선원 총기류 반입 속수무책, 대러 정보·치안망 확충 시급

4월 17일 오후 8시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B아파트 101동 현관 앞. 흰색 점퍼에 마스크와 벙거지 모자로 얼굴을 가린 한 러시아인의 그림자가 스쳤다. 날렵한 동작의 이 남자는 아파트로 들어서던 러시아 선박 회사 콘코리아 서비스 사장 나우모프 바실리(54)와 그의 보디 가드 니콜라이(39)를 뒤따라 들어 가 곧바로 총격을 가했다. 영화 같은 마피아 범행이 부산시에서 벌어진 것이다.

괴한은 먼저 권총으로 니콜라이에게 허리와 복부에 모두 3발을 발사, 완벽히 제압했다. 곧 이어 바실리에게는 정확히 머리에 5~6발의 권총을 난사, 현장에서 즉사시켰다. 범행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초, 범인은 현장에 범행에 사용된 소음기가 장착된 소련제 바이칼 권총1정과 사제 권총 1정을 버리고 이내 어둠 속에 묻혔다. 어둠 속의 부산 도심에서 갱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 발생 후 바실리는 대형 선박을 37척이나 보유한 사할린 일대의 ‘르브니 카롤’(선박왕)이자 마피아 두목인 것으로 드러났다. 배정 받은 쿼터량을 웃도는 수산물을 연해주 일대에서 어획해 부를 축적해 오던 그는 국경수비대의 단속이 죄어 오던 지난해 5월 국경 수비대 책임자를 살해하고 일본과 한국 등에서 도피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연해주 일대의 어획 쿼터 등 수산업 관련 이권을 둘러 싸고 경쟁 마피아조직과도 갈등을 빚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바실리는 이번 사건 발생 전 1년여 동안 끈질긴 보복 살해 위협에 시달린 나머지 한국, 일본, 동남아 등지로 옮겨 다니며 피신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체류기간은 한국보다 길었다. 그렇지만 결국 부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아, 러시아 마피아들은 한국(부산)만큼 좋은 범행 장소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 마피아의 해방구인가

러시아 마피아가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수리차 부산항에 입항한 러시아 선원들이 초코파이, 담요, 폐타이어 등을 무더기로 구입하면서 일기 시작한 보따리 무역이 그 출발이었다. 90년대에 접어 들어 연해주 일대 수산물의 주요 소비지로 부산이 급부상하는 바람에 이 같은 추세에 가속이 붙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나 사할린 일대의 수산업체가 전부 마피아들의 수중에 장악된 것은 국내 수산업체가 이들과 거래를 트면서 부터다. 이들이 한국에 거주하며 에이전트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에겐 상식이었다.

95년 부산항을 통해 기관총을 반입하려다 적발된 사건이 기폭제였던 셈이었는데 99년에는 마피아 두목급이 부산에 무역회사를 차리고 채권ㆍ채무 해결사 역할을 하더니 2001년 마피아 조직원 8명이 부산 동구 초량동 텍사스촌을 상대로 마약을 공급하다가 적발되는 등 그들의 범죄는 증가일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들은 마피아 계보로 따지자면 동네 주먹 정도에 지나지 않는 하급 마피아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불법 수산물 거래와 돈세탁 등을 일삼는 거물급 마피아가 실체를 드러낸 것은 바실리가 처음인 셈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면 엄청난 수산물 불법거래를 둘러싼 차익 때문에 러시아 마피아의 정체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전혀 적발될 수가 없다. 러시아 정부 당국은 35%에 달하는 수출 관세를 부과하고 있어 마피아가 국내업자와 짜고 공해상에서 수산물을 밀거래하거나,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부산항으로 곧 바로 반입한 뒤 양을 속여 수산물을 횡령할 경우 양 측 모두 엄청난 차익을 챙길 수 있다.


연해주일대 수산물은 마피아 핵심자금원

러시아무역을 하는 A씨는 “쿼터를 배정 받지 못하는 한국 수산업체는 어떤 형태로든 마피아와 연계 고리를 갖고 공해상에서 러시아 어선으로부터 명태 등 어획물을 넘겨받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경수비대나 수산당국의 공해상 등에서의 어획물 불법조업 감시도 크게 강화되고 있지만 큰 성과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당국은 불법조업 혐의선박에 대해 조업정지를 명령한 뒤 듣지 않으면 곧 바로 발포, 침몰시키는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으나 수천만 달러에서 수억 달러까지 엄청난 수익이 걸린 불법조업을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마피아들은 국내 수입대행업체 등과 결탁해 수입 수산물량을 속이는 방법으로도 거액의 자금을 챙기고 있다.

러시아 킹 크랩 수입상 B씨는 “국내 수산업체 및 입항 수속 대행사들은 수산물 검역당국이 인력 및 장비부족 등으로 물량을 정확히 계측할 수 없는 허점을 이용해 신고량을 줄여주고 커미션을 받고 있다”며 “대행사 등은 이 같은 검은 돈을 세탁까지 해주고 있어 마피아들은 한국에서는 무엇이든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수산업자 C씨는 “선사를 갖고 있는 두목급 마피아의 경우 생선값의 일부를 세탁한 뒤 본국으로 송금하지 않고 제3국으로 빼돌리고 있다”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국제금융이 느슨한 한국은 마피아들에게는 천국”이라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치안문제로 이 같은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총기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내로 반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통상 선박에는 선원들의 범죄행위 등에 대비해 선장이나 간부들이 총기류를 휴대하고 있어 부산항에는 사실상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총기류만해도 연간 수천 정에 달하는 형편이다.

출입국 당국의 이들 총기에 대한 감시(세관용어로 ‘시봉’)소홀이 있으면 어쩌나하는 우려도 있지만 러시아 선원들의 주입국장인 감천항에 가보면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함을 곧 바로 깨닫게 된다.

새끼줄로 울타리 쳐 놓은 허술한 감천항은 마음만 먹으면 대포라도 갖고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부두 안팎으로 통하는 문은 모두 8개이지만 X-레이 투시기가 설치된 곳은 2곳뿐이어서 하루 1,000여명씩 드나드는 러시아 선원들이 무엇을 갖고 있는 지 확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차량 검사도 육안에 의존하는 정도이고, 감천항 주변 7.4㎞에 둘러쳐진 울타리에는 띄엄띄엄 설치된 폐쇄회로 TV가 감시장치의 전부이어서 밤이나 악천후 때는 얼마든지 총기류 등을 던지고 받아도 아무런 제지도 하기 힘들다.

부산해양청 감천항 출장소측도 “감천항에 정박 중인 선박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러시아 선원들이 야음을 틈타 총기류를 철조망밖에 누군가에게 던질 경우 막을 방법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 놨다. 부산 경남 본부 세관측은 최근 2년간 탄알 등 모두 2,100여점의 위험물을 적발했다.

감천항 주변에서는 나아가 “마피아들이 총기류를 마구잡이로 국내로 밀반입할 경우 한국 경찰의 감시망이 강화돼 마피아 해방구를 잃을 우려가 있는 만큼 마피아들이 스스로 총기밀반입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자조섞인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마피아는 또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살인이나 방화 등 극히 무자비하고 단순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국내 모 인사가 10억원을 투자해 러시아 사할린에 노래방을 개업하려 했으나 뒤를 봐주기로 한 마피아가 경쟁 마피아에게 모조리 당해 돈만 날리고 돌아 왔다’ ‘사할린 관광지에 일본인이 투자해 호텔을 신축했으나 마피아가 일본인을 강제 축출하고 호텔을 빼앗았다’는 등 정확히 입증은 안되지만 마피아들의 속성을 드러내는 입소문이 줄을 잇고 있다.


텍사스촌은 한ㆍ러 교역장?

마피아를 둘러 싼 핵심 무대가 감천항이나 연해주 일대 공해상이라면, 텍사스촌으로 널리 알려진 부산 동구 초량동 외국인 거리 일대는 언뜻 보기에 한ㆍ러 교역장에 불과하게 비친다. 실제로 이곳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옷을 고르거나 술을 마시는 러시아인들을 보고 마피아를 연상시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피아 이야기는 곧잘 나온다.

이 곳 클럽에서 일하는 러시아 무용수나 술 시중을 드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마피아를 통해 E-6(연예인 비자)를 발급 받아 국내에 취업한 것이다.

러시아 마피아 사정을 잘 아는 한 전문가는 “인구 60만명의 사할린에서도 밤에 클럽이나 카지노에 가면 마피아를 만날 수 있다”며 “마피아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국 조폭처럼 검은 양복 등으로 치장하지 않고 남루한 작업복 차림이어서 설령 거물급 마피아 두목이 텍사스촌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알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마피아가 불법 무기 불법 조업 등과 맞물려 있다는 정황적 증거로 봤을 때 적절한 차단책 마련이 절실한 실정이다. 아직 경찰 세관은 물론 국정원 등 관련 당국의 마피아에 대한 정보는 대체로 어두운 형편이다. 이번 사건에서 숨진 바실리는 일본에 체류할 때는 일본 경찰의 장치한 정보 치안망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다 한국에 들어온 후 허술한 국내 치안망의 희생양이 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러시아 및 인터폴 등과의 범죄 정보 교류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이번 사건에서 경찰은 인터폴에 공조 수사를 여러 번 요청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 언론 등을 통한 정보가 상당 부분 경찰 수사에 도움을 준 실정이다.

회사원 박모(26ㆍ여ㆍ 부산 동래구 온천동)씨는 “TV에서 러시아 마피아의 권총 살해장면으로 보고 거리에서 부딪치는 러시아인들이 갑자기 무서워졌다”며 “텍사스촌 등이 관광 명소가 아닌 범죄 집단 은신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며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정보 및 수사능력 배양이 시급한 시점이다.

부산=김창배 기자 kimcb@hk.co.kr

입력시간 2003/04/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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