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고니

제정 러시아로의 역사기행

중견 DVD제작사 스펙트럼 DVD에서는 ‘러시안 클래식’이라는 타이틀로 러시아 고전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격정적인 사랑의 비극을 그린 <잔혹한 사랑 이야기>, 전쟁에 희생되는 연인의 사랑을 그린 <학이 날다>,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아고니>, 구로자와 아키라가 러시아에서 찍은 <데루스 우잘라> 등이 출시되었다.

이 중 <아고니 Agony>는 전쟁 영화 <컴 앤 씨>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엘렘 클리모프의 1973년 작으로, 내용이나 형식 모두 격렬하고 분열적이어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먼저 짜르 군주제가 극심한 부패상을 보였던 제정 러시아 말기인 1915년 전후의 시대 상황이 나레이션된다. 여기에 흑백의 기록 필름, 그리고 현대 전위 연극 무대 같은 기이한 세트와 표현주의 그림을 보는듯한 선명한 칼라의 극이 뒤섞인다.

이 기본 구조에 복잡함을 더하는 것이 매 장면의 주요 등장 인물 명을 명기하면서 단락을 지우는 것이다. 혼란했던 당대 러시아 역사와 외우기 힘든 긴 러시아인 이름을 받아 적으며 봐도 겨우 따라갈 정도다.

13세기부터 집권한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아나톨리 로마쉰)는 안팎으로 시련에 처해 있다. 백혈병을 앓는 병약한 아들을 둔 황후는 성직자 라스푸친(알렉세이 페트렌코)의 기도와 예언, 기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라스푸친이 갖가지 기행으로 추문이 끊이질 않는 야심가라는 점이다. 측근들은 그를 추방하라 권하나 황후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된다.

밖으로는 문맹, 빈부 격차, 관료주의의 인권 탄압, 1차 대전으로 드러난 정부의 무능 등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혁명이 감지된다. 연이은 파업과 군대의 발포로 인한 민중 폭동은 혁명을 잉태한다.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된 라스푸친은 암살되고,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쫓겨나 처형된다. 그리고 1917년 10월 25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1982년 베니스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역사극 <아고니>에 대해, 소련 당국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내 개봉이 허락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별도의 디스크에 수록된 <아고니>의 DVD 서플에는, 당시 출연 배우와 제작진이 25년 전에 완성된 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긍지를 토로한다.

“만들기 힘든 시대에 만든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 아쉬움이 크다” “당시 출연진이 많이 죽었다. 그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이야기한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아고니>의 서플 중 아카이브 코너에는 두 개의 기록 필름이 들어 있다.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선출되는 장면과 훈장 수여 모습, 병사들의 훈련을 찍은 필름.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의 성 피터 앤 폴 성당에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유골 안치식 필름. 옐친은 “80년 전 황제와 그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됐다. 우리는 극악무도한 살인을 숨기고 살아왔다. 그것은 수치스런 역사였다”고 연설한다.

라스푸친으로 분했던 배우 알렉세이 페트렌코는 인터뷰에서 “그들은 황제의 지도자를 죽였다. 그리곤 러시아를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글을 썼다. 라스푸친은 순교자였다”고 말한다.

이 서플만 보면 이제 러시아 정부와 국민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실 종교 지도자였던 라스푸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 외 감독 알렘 클리모프에 관한 영문 글 자료가 서플로 들어 있다.

옥선희 DVD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5/0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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