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 개그펀치] 바치고, 먹던 시절

내가 방송작가로 있다 보니까 때때로 엉뚱한 청탁이 들어올 때가 있다. 어느날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개그맨이 되고싶다거나 개그작가가 되고싶은데 도와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정도는 내 전공이니까 공채시험을 보라거나 어떠한 공부를 더 한 후에 도전을 해보라는 식의 조언을 해줄 수는 있다.

물론 그들이 기대하는 가장 빠른 길은 나의 이런 조언이 아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 당장에 방송국에 입성을 시켜서 작가나 개그맨으로 활약을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후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사회라는 개념을, 하나의 단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내 직업상 몇마디 조언이라도 나불댈 수 있지만 정말 난감한 경우도 있다. 먼먼 친척들이 떡 하니 전화를 걸어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조카, 난데 내 사돈 처녀가 탤런트가 되려고 하는데 자네가 방송국에 다니니까 거 드라마 PD 좀 소개시켜 줘. 내 사돈 처녀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 이쁘고 몸매 잘 빠지고 소질도 많아. 걔가 제대로 사람만 만나면 스타로 뜨는 건 당연지사니까. 뭐 PD한테 술을 사야 하면 그것도 할 수 있고. 조카한테도 섭섭치 않게 해줄게.”

마치 나를 뚜쟁이쯤으로 여기며 무슨 은밀한 거래를 하듯이 어르고 뺨치는 능란함까지 발휘하면서 엉뚱한 얘기까지 해대는 데는 할말을 잃을 정도이다. 드라마 PD만 만나면 당장에 드라마에 나오고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는 방송국 줄을 이용해서 소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실 방송국이 얼마나 방대한 일터인지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나만 해도 내가 일하는 예능국쪽 사람들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한다. 하물며 드라마나 교양 파트 쪽 사람들은 몇몇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이름만 들어봤지 얼굴도 모르고 교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방송국에 있다고만 하면 무조건 다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무모함이 젊은 여성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방송국 PD나 연예 매니저를 사칭한 사람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해 소위 돈 뺏고 몸 뺏는 일이 몇번이나 있었고, 최근에는 현업 PD와 매니저가 미성년자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해 구속되는 일까지 있었다. 몇 번씩 되풀이 되고 있음에도 이런 사기행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연예계에 대한 일반인의 오래 묵은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연예인만 되면 금방 엄청난 돈을 벌어서 망해가는 집안도 살릴 수 있고 또 그러한 스타가 되자면 연예계 종사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또 그러자면 그들에게 육체적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으로 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한 스타는 재능과 엄청난 노력, 그리고 완벽한 매니지먼트에 의해 탄생되고 관리되어 진다.

물론 과거에는 이런 불상사들이 있긴 했었다. 주먹구구식의 연예인 관리로 인해 출연 기회를 얻으려고 PD들과 관련을 맺는 경우가 있었다. 연예인 A는 여자 연예인들은 몸을 주면서 출연 기회를 얻는데 자기는 남자라 그게 불가능한 것이 무지 억울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PD에게 여자를 선사하는 것이었다. A가 아는 여자라야 대부분 술집 여자였으므로 그 중 제일 티가 덜 나는 예쁘장한 아가씨를 골라 PD에게 바쳤다(?).

“제 팬이라고 찾아온 여대생인데 정말 착하고 순진해요. ” PD가 그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A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고정출연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잔뜩 기대를 하고 PD를 찾아갔다.

“여대생이라 역시 틀리죠? 저 이번 주부터 고정으로 출연해요?” 그러자 PD의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길길이 날뛰더란다. “여대생 좋아하네. 걔 때문에 성병 걸렸어. 고정출연? 웃기고 있네. 너 앞으로 영원히 출연정지야. ”

요즘은 정말 이런 일 없다.

입력시간 2003/05/06 16:3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