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단 일본계 대금업체, 햇빛 속으로

대부업법 통과 계기로 국내 사금융시장 빠른 속도로 장악

(2년전) “일본계 기업으로 알고 있는데 모기업이 어느 곳인지 좀 알려 주세요.” “글쎄요, 저희도 정확한 것은 잘 모르거든요.” “홍보 담당자는 없습니까?” “글쎄, 언론에 자꾸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가 않아서요. 부정적인 내용으로 기사를 쓰실 것 아닙니까.”

(현재) “저희는 옛 히타치 신판, 지금은 아에루라는 일본 대금업체를 모회사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A&O인터내셔날, 프로그레스, 여자크레디트 등 7개 관계사가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관계사들의 영업 실적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연도별로 즉시 수치를 뽑아드리죠.”


국내 저축은행 실적 앞질러

확연히 달라졌다. 음성적으로 야금야금 국내 사금융 시장을 잠식해 오던 일본계 대금업체가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다는, 준(準) 제도 금융기관으로서 떳떳이 존재를 알리겠다는 태도다. 불과 1~2년 전과 천양지차다.

지난해 10월 말 대부업법이 통과된 것이 계기였다. 최고 금리를 연 66%로 제한하되 정식으로 등록한 업체에 대해서는 영업 활동을 보장하는 내용의 대부업법은 국내 사채업체를 양성화하겠다는 당초 취지 보다는 오히려 일본계 대금업체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 됐다.

국내 상호저축은행(옛 상호신용금고)의 대표 주자 격인 서울의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은 2001년 말 반기 결산에서 13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121개 저축은행 중 가장 좋은 실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반기 순익은 10억원으로 전년의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지난해 말 반기 결산에서 가장 실적이 좋았다는 푸른저축은행의 당기순익도 113억원에 불과했다.

반면 일본계 대금업체 A&O인터내셔날은 2001년 33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낸 데 이어 지난해에는 354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다. 국내 출범 첫해인 1999년 10억원에서 2000년 154억원으로 급격히 증가한 이래 꾸준한 상승세다. 순익을 절반으로 나눠 반기 순익으로 계산한다 해도 국내 저축은행의 실적을 가뿐히 능가하는 수치다.

A&O 인터내셔날보다 7개월 가량 늦게 국내에 진입한 프로그레스 역시 상승일로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23억원(2000년), 189억원(2001년), 292억원(2002년) 등 순익은 갈수록 확대되는 추세다. 30년 역사를 가진 국내 저축은행 순익 1위 업체를 일본계 대금업체들이 영업 3년만에 가볍게 따돌려 버린 것이다.


아에루 주왕국 건설, 흑자행진

일본계 대금업체의 핵은 아에루(옛 히타치신판)이다. 아에루는 일본 대금업계에서 대출 잔고 기준으로 10~15위권을 지키고 있는 중견 대금업체. 대출 잔고가 원화로 1조원을 넘고 대출 고객은 30만명을 웃돌고 있다.

99년3월 후지기획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한국의 무역업체 A&O인터내셔날을 인수해 국내 대금업에 진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프로그레스(99년10월) 해피레이디(2000년 11월) 파트너크레디트(2001년 3월) 여자크레디트(2001년 5월) 예스캐피탈(2001년 9월)에 이어 지난해 4월 설립한 퍼스트머니까지 차례로 설립해 국내 총 7개 대금업체에 직ㆍ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들 7개사의 국내 대출 잔고는 1조282억원으로 일본 모회사 수준에 육박했다. 게다가 아직 결산이 이뤄지지 않은 퍼스트머니를 제외한 6개사가 모두 지난해 흑자를 기록했다. 이들 6개사의 전체 당기순이익은 무려 1,013억원에 달한다.

이외에도 센츄리서울, 원크레디트, 산와머니 등 20여개 일본계 대금업체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 6개사가 국내 대금업 상위 1~6위를 휩쓸고 있다. 국내 사금융 시장에 이른바 ‘아에루 왕국’이 건설된 것이다.


음성적 이미지를 벗었다

이들이 국내 대금업 시장을 급속히 잠식할 수 있었던 비결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언론 등 외부에 철저히 모습을 감추는 ‘모르쇠’ 전략을 통해 진입 초기에 일본 자금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부정적 이미지를 최소화한 것이었고, 둘째는 과학적인 대출 심사 및 채권 추심 기법을 기반으로 폭력과 불법의 온상이라는 사채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서울 명동 입구 유네스코회관 6층에 자리잡은 A&O 인터내셔날 사무실.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단정한 복장의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인사말로 맞이 한다. 20여평 남짓한 사무실은 그다지 호화롭지는 않아도 깔끔하다.

6개의 상담 창구 각각에는 대출 금액별 이자표와 함께 이른바 ‘대출 수칙’이 적혀 있다. ‘대출 서류 외부 반출 금지’, ‘대출이 거절되거나 대출 금액이 희망 금액보다 적더라도 사유는 고지하지 않는다’ 등등. 연 100%에 육박하던 대출금리도 대부업법 시행 이후 65.7%로 낮아졌다.

금리가 여전히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100만원을 빌릴 경우 하루에 1,800원의 이자를 내는 꼴이다. 열흘 정도 급전이 필요하다면 1만8,000원만 부담하면 된다는 얘기다. 만약 급하게 오전에 돈을 빌렸다가 오후에 다시 갚는다면 단 한 푼의 이자나 수수료를 물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소득증명이나 납세필증 재직증명서 등 많은 서류나 보증인을 제시하지 않아도 돼 부담이 없다는 것이 매력이다.

대출 심사 및 채권 심사 노하우는 철저한 영업 비밀이다. 무담보, 무보증으로 이뤄지는 대출 금액은 아무리 많아도 500만원을 넘지 않고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돈 1,000원도 대출이 이뤄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개인 신용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출 승인 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신청 직후 길어야 30분 내에 대출이 이뤄지지만 가족 사항, 직장, 소득액 등 30여가지 항목에 대해 꼼꼼한 검토가 이뤄진다. 철저한 연체 관리도 강점이다. 이들 7개사의 연체율은 13~18% 수준으로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다.


TV광고 등 적극적인 홍보마케팅

프로그레스는 최근 대금업체로는 이례적으로 케이블 TV 광고를 시작했다. ‘급전이 필요한데 요즘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기 힘들다. 보증을 서 달라고 하기도 힘들다.

이럴 때 프로그레스가 무보증무담보로 편하게 돈을 빌려 준다’는 내용이다. 회사 이름도 없이 ‘급전 제공’ 등의 1단짜리 음침한 신문 광고만 보아 온 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해피레이디, 여자크레디트, A&O인터내셔날 등도 조만간 TV 광고를 시작할 예정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 버린다는 취지로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A&O인터내셔날측은 지난해 4월 10억원 가량의 기금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만들어 실업계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나눠주고, 여성 전용 소비자 금융업체를 표방하는 여자크레디트는 지난해 말 3,000만원의 여성자립기금을 내놓았다.

또 프로그레스는 지난해 전국 주요 백화점을 돌며 건전한 소비생활을 위한 강좌를 운영하기도 했다.

홍보 채널을 아예 갖추지 않거나 외부 대행사를 통해 필요한 자료만 공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난해부터는 회사마다 자체 홍보팀을 두고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한 변화 중 하나다.


일본계 업체 로의 엑소더스

일본계 대금업체가 양지로 올라 서면서 국내 금융권의 우수 인력들도 대거 몰려드는 추세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불어 닥친 벤처 붐 당시의 ‘벤처 엑소더스’가 재현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다.

지난해 10월 삼성증권에서 최우수지점상을 받았던 이수원 도곡동지점장이 A&O인터내셔날의 CEO 자리로 옮긴 데 이어 제일기획 오승열 국장이 여성 전용 대금업체인 해피레이디로, 신한은행 세텔렘 캐피탈 강승태 부사장이 파트터크레디트 CEO 자리로 이동했다. 중간 관리자급 인재들도 속속 몰려드는 추세다.

제일은행, 동화은행,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 금융권 출신은 물론이고 미국 경영학 석사(MBA) 학위 소지자와 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가진 인재 20여명이 최근 줄줄이 일본계 대금업체에 둥지를 틀었다.

특히 2월 실시한 A&O인터내셔날과 프로그레스 대졸신입사원 공채에서는 30명 모집에 1,2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려 인기를 실감케 했다. 지원자 중 석사급 이상이 89명, 해외 유학파가 62명에 달했다.

A&O인터내셔날 성열용 인사팀장은 “일본 리쿠르트 조사에 따르면 MBA 출신과 유명대학 경영학부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으로 다케후지나 아쿠무 등 대부업체들이 꼽히고 있다”며 “대부업이 고수익 사업으로 급성장하는 국내에서도 조만간 이런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서 돈놀이” 비판도 높아

일본계 대금업체의 급신장에 우려의 눈길도 적지 않다. 이들 업체 대부분은 출자금과 일본 현지 차입금이 20% 안팎에 불과하고 80% 가량은 국내 은행 등에서 차입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해오고 있다. 연 15~18%의 금리로 대출을 받아 한때 연 100% 가까운 고금리로 서민들에게 빌려줘 70%가 넘는 예대 마진을 챙긴 셈이다.

최근에는 국내 시장에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해 10% 대 안팎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아에루를 필두로 일본계 대금업체들이 국내에서 대 성공을 거둠에 따라 향후 일본 대금업체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실제 프로미스, 아이필, 니신 등 일본 대금업 시장 5위권 안팎을 유지하는 굴지의 대금업체가 호시탐탐 국내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현재 국내에 진출한 일본 대금업체는 어찌보면 피래미 수준에 불과하다”며 “대형 대금업체들이 물밀 듯이 밀려올 경우 국내 사금융 시장은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과학적인 고객 관리를 내세우면서도 채권 추심 과정에서는 여전히 협박 등 과거의 사채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 금융감독원에는 일본계 대금업체들의 협박 빚 독촉 신고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A&O인터내셔날 임주성 부장은 “워낙 시장 점유율이 높다 보니 일부 추심 과정에서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며 “최근 전국 100여개 지점에 감시용 녹음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불법 추심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5/07 14:32


이영태 이영태 @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