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정훈희(下)

국제 가요제 최초 수상자 '영원한 가수'로 변함없는 활동

1972년 '송 오브 올림피아드'로 명명된 제5회 그리스 국제가요제가 아테네에서 열렸다. 정훈희는 이봉조 작곡의 '너'를 불러 장려상과 더불어 참가 아시아 가수들 중 유일하게 베스트 7에 진입, 4위에 입상을 했다.

그 해 10월엔 이봉조 작곡 '좋아서 만났지요'로 동경국제가요제 본선에 다시 진출, 특별 가수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이때 작곡가 이봉조는 베스트11 작곡가상을 동반 수상하며 환상의 콤비라는 명성을 드높였다. 당시 한복을 입고 출전한 정훈희의 의상은 '한국 고유의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 뒤에는 선배가수들의 숨겨진 노고가 있었다. 당초 드레스를 입고 출전을 하려했던 그녀는 한복 출전을 고집하는 이봉조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준비해 간 한복이 없어 서울에 있던 선배 가수 현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정훈희와 몸매가 비슷한 한명숙씨의 한복을 빌려 급하게 공수해 주었던 현미는 숨은 공로자였다.

2회 연속 동경가요제에 수상한 정훈희는 73년 일본 최대음악재단인 야마하 재단의 킹 레코드와 1년 간 녹음 계약을 채결하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예명을 하니 준으로 정한 그녀는 무명 일본인 작곡가의 '이름하여 사랑'이란 곡과 이봉조의 '좋아서 만났지요'를 '고독은 무거워'로 변경, 3월21일 싱글 도너츠 디스크를 발표했다.

일본 현지에서는 "국제 가요제 수상 경력의 톱 가수가 아마추어 작곡가의 작품 발표에 응한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당시 일본에 건너 가 활동을 했던 우리 가수들의 성적은 부진했다. 비슷한 시기에 '준과 숙'이란 예명으로 일본 활동을 시도했던 펄씨스터즈도 좌절의 기억 뿐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일본 진출을 시도했던 정훈희도 사정은 비슷했다. 현지 사정을 모른 채 큰 꿈만을 안고 무리하게 일본 진출을 시도했던 정훈희는 서신으로 야마하 전속 가수로 홍콩가요제참가 의사를 밝히는 등 흔들리는 정체성을 보였다.

74년 초 귀국 때는 말끝마다 일본식 발음을 연발하며 '일본으로 건너가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것을 "일본에 귀국해서.."라는 표현을 써 '머지않아 일본에 귀화할 예정'이라는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74년 5월 조선공사대표이사 남궁련씨의 사돈인 한영복씨와 결혼설이 나돌았지만 역시 해프닝이었다. 일본 진출 실패 후 정훈희는 쓸쓸히 귀국해 한동안 잠적 했다. 공백을 깨고 이봉조에게 12곡을 받아 다시 활동에 들어가기에는 3개월의 기간이 필요했다. 이봉조와 재결합한 그녀는 75년 '무인도'를 가지고 남미의 칠레 국제가요제에 도전했다.

여기서 그녀는 인기 가수상과 더불어 3위에 입상함으로써 부활을 선언했다. 작곡가 이씨는 편곡상을 동반 수상했다. 이때 재기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정훈희는 현지에서 장출혈과 신경 쇠약 증세로 입원까지 했다.

당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이 보내 온 화환은 화제가 되었다. 다시 인기를 회복한 정훈희는 그 해 7월 큰 사고를 당했다. 도봉구 삼미극장 분장실에서 현철원이라는 20대 청년에게 콘크리트조각으로 얼굴을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성 팬이 무대로 찾아가 애인임을 자칭하며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다 거절당하자 저지른 사건이었다.

이후 정훈희도 대마초 파동에 연루, 입건되면서 활동 정지를 당했다. 76년 4월 임희숙 등과 함께 해금이 되었지만 TV등 방송 매체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77년 8월 TBC '쇼는 즐거워'는 재기의 무대였지만 예전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 다시 가요제 출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79년 제20회 칠레가요제. 정훈희 이봉조 콤비는 '꽃밭에서'를 불러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일궈냈다. 당시 칠레가요제는 5만명을 수용하는 노천극장에서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치러졌던 거국적인 행사였다. 그녀는 76년 대마초가수로 처벌을 받은 이후 또 다시 국제가요제에서 국위를 선양하며 대마초가수들의 해빙기를 가져왔다.

당국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 것"이라며 정훈희의 칠레 가요제 실황 필름을 전국에 방송하기도 했다.

80년 정훈희는 라스트찬스의 리드 싱어 출신 로커 김태화와 약혼발표를 했다. 두 사람은 교제 1년 만에 심한 성격 차와 정훈희 집안의 강력한 반대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재결합한 정훈희는 83년 김태화의 아들을 낳았다.

이후 김태화는 국내 활동을 선언하고 그룹 뿌리의 리드싱어로 출발했다. 그는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79년 말 캐나다 태평양가요제와 82년 MBC국제가요제에 '변덕스러운 그대'로 참가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다이나믹한 록 창법과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로 밤무대에서 젊은 층의 인기가 대단했던 그는 '김태화와 타이거즈'라는 자신의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1989년 정훈희, 김태화 부부는 '우리는 하나'라는 듀엣음반을 발표해 10만 여장의 레코드 판매고를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현재 대한과 민국 두 아들과 함께 부산 인근의 기장 해변에 까페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신세대 가수로 부상했던 J는 그녀의 조카로, 음악 가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훈희는 기장읍 문화예술회장으로 지역 문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이수미 등 친분이 두터운 동료 가수들과 함께 '우정의 콘서트'란 이름으로 서울, 부산 등에서 변함 없는 노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5/0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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