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 직격탄…여기저기서 줄초상

사스 실업자 양산조짐, 중소 수출업체는 피해에 속수무책

코오롱세계일주 서면지점 전영대(29) 과장은 요즘 ‘전화 노이로제’에 걸렸다. 여행사 직원이 중요한 영업 수단인 전화를 마다할 리 없을 테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확산되기 시작한 이후 여행사로 걸려오는 전화는 열에 아홉, ‘예약 취소’를 통보해 오는 내용인 탓이다.

최근엔 ‘대어급 상품’을 날려 버렸다. 지난 3월 한 여성 친목단체에서 16명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묶어 둘러 보는 6박7일짜리 ‘쏠쏠한’ 상품을 예약 받아 이미 1차례 연기된 터였다. 출발일(4월26일)이 다가 오면서 조바심을 내고 있던 즈음,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사스가 진정되지 않으면 다시 연기한다고 약속했죠? 올 추석 이후로 무기 연기할게요.” 너무도 차가웠다. 전 과장은 “전화 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 놀라기 일쑤”라며 “어떤 때는 아예 수화기를 내려 놓고 있기도 한다”고 했다.

‘사스 증후군’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 해외 출장이 잦거나 사람들을 많이 접촉해야 하는 이들은 ‘혹시 공포증’에 시달리고, 사스에 민감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벌써 1개월 이상 일손을 놓은 채 ‘패닉’ 상태에 빠져 들었다.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사스 안전지대’라는 보건 당국의 발표도, 중국을 중심으로 사스가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는 외신 보도도 이들에게는 치료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스 증후군 환자들은 “21세기 흑사병이라는 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면 최소 수개월이 걸리지 않겠느냐”며 치를 떨고 있다.


사그러들지 않는 ‘혹시 공포증’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사스가 처음 찾아왔던 3월부터 사스 증후군은 ‘혹시 공포증’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정한 대상도 없다. 옆 사람이 기침만 콜록콜록 해도, 가족의 몸에서 열만 난다고 해도 “혹시 사스가 아닐까” 의심하는 분위기다. 공포 영화도 자주 보면 무디어지기 마련이라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스 공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5월2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 A내과. 오전 9시30분 문을 열자 마자 환자 10여명이 줄지어 대기한다. 이들 중 절반 가량은 사스가 의심돼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다. 결과는 100% 사스와 무관했지만 대부분 초조한 표정이다. 40대 중반의 한 여성은 “감기 기운이 있을 때 이전에는 약국에 들러 알약을 사먹는 정도였지만 요즘은 주변 사람들의 채근을 못 이겨서라도 병원을 찾아야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응급의료 상담전화인 서울1339 정보센터도 ‘사스 호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스 발생 초기 하루 120건이 넘었던 문의는 한 때 40~50건으로 줄었다가 요즘 다시 70~80건으로 늘어났다.

강홍성 상황반장은 “초기에는 사스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의 전화가 많았지만 요즘은 고열 등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나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4월 이후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3,500건 가량의 문의 전화가 접수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전했다.


여행 업계는 지금 무기 휴가 중

사스의 직격탄을 맞은 여행 업계에는 요즘 때 아닌 ‘장기 휴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중국 여행 손님이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이고 홍콩 싱가포르 태국 푸켓 등 주요 여행지 고객들이 뚝 끊기면서 회사측이 직원들에게 ‘장기 무급 휴가’를 독려하고 있는 탓이다.

대표적인 곳이 중국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랜드사(여행사에게 상품을 알선해 주는 여행사). 대체 상품을 개발할 수도 없는 터라 대부분 업체가 벌써 1개월 이상 휴업에 들어간 상태다.

중국 전문 랜드사인 랜드차이나의 한 직원은 “사스가 진정될 때까지라는 불확실한 조건을 달아 회사가 무기 휴업에 들어간 상태”라며 “직원들은 모두 무급으로 휴가를 받고 있어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여행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 상품이 호황을 맞는 이례적인 현상도 생겨나고 있다. 여행사 직원들에게 여행 상품을 미리 체험해 보도록 저렴하게 판매되는 ‘AD(에이전트 디스카운트) 투어’ 상품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것.

한 여행사 직원은 “통상 30만~40만원 하는 AD투어 상품이 요즘에는 20만원 미만으로 판매된다”며 “어차피 회사에 나와도 할 일이 없어 장기 무급 휴가를 내고 AD 투어를 즐기는 직원들이 주변에 많다”고 말했다.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도 처절하다. 해외 전문 여행사들은 최대 성수기인 4~5월 예년에 비해 고객이 10~20%대로 줄어 들자 국내 여행 상품까지 판매하고 나섰다.

청주 코리아나투어스 임일수 과장은 “해외 여행 손님은 호주나 괌 정도가 고작”이라며 “울며 겨자 먹기로 제주도, 울릉도, 외도 등의 상품을 팔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비용 절감을 위해 소규모 여행사끼리 사무실을 통합하거나 직원들에게 무급 휴가를 독려하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기내는 안전” 홍보에 열 올리는 항공 업계

항공사들도 매출 감소에 몸살을 앓기는 마찬가지다. 이라크 전쟁에 이어 사스 파동이 겹치면서 중국 방콕 싱가포르 등 동남아 노선을 중심으로 항공 수요가 급감했다.

대한항공의 경우 중국 노선 탑승률은 4월 한달간(28일까지) 55%로 전년 동기에 비해 20%포인트나 줄어들었고, 동남아 노선 탑승률 역시 54%로 지난해 4월에 비해 24%포인트나 감소했다. 특히 탑승객 감소로 운항 편수를 줄인 것까지 감안하면 실제 탑승률은 이보다 훨씬 저조할 것으로 보여 월 400억~500억원 가량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항공사들은 유례 없는 불황 탈출을 위해 파격 세일과 깜짝 이벤트를 동원하는 추세. 대한항공은 5월 한달 동안 자사 홈페이지를 이용한 항공권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인천~도쿄 노선을 최대 42% 할인해 주는 등 대대적인 할인 행사에 들어갔다. 아시아나항공도 부산~선양 노선의 경우 최대 40%까지 항공권 할인을 해주고 있으며, 홍콩 싱가포르 방콕 마닐라 등의 노선에는 30%까지 할인율을 적용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항공사들은 “기내는 안전하다”는 내용의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항공사들은 보건 당국과 언론에 은근히 화살을 돌린다. “마치 항공기 기내에서 사스가 전염될 수 있는 것처럼 왜곡해 고객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서강윤 부장은 “항공기 공기 순환 구조상 사스가 전염될 우려가 거의 없는 데도 보건 당국이나 언론이 마치 기내 전염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며 “사스 자체보다도 무책임한 보건 당국의 발표와 언론 보도 때문에 고객들이 더 줄고 있다”고 화살을 돌렸다.


호텔 업계는 품격 파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온 호텔 업계는 ‘떨이 행사’까지 동원하는 등 ‘품격 파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라크 전쟁과 사스 영향으로 외국인 예약 취소가 잇따르면서 호텔 투숙객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탓이다.

롯데호텔의 4월 한달 간 객실 이용률은 고작 49%. 전체 객실 1,486개실 중 통상 700~800개 실이 비어 있다는 얘기다. 호텔 관계자는 “서울 시내 대부분 유명 호텔 객실 이용률이 50% 안팎에 머물고 있다”며 “3~6월이 성수기인데 비수기보다도 더 못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면 제주 롯데호텔의 경우 국내 여행이 대체 상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4월 객실 이용률이 90%를 넘어서는 등 여름 성수기를 능가하는 호황을 누려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외국인 고객 유치에 실패한 호텔 업계는 다양한 이벤트를 동원해 내국인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호텔신라는 경기에 영향을 덜 받는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일명 ‘힘내라’ 패키지를 상품화했다.

또 창립 30주년을 맞아 5월 5~10일 매일 2명의 내국인 투숙객에게 VIP들이 묵는 최고급 스위트룸(하루 850만원)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그랜드 호텔은 개관 7주년을 기념해 5월25~31일까지 매일 7번째 온라인 예약자에게 스위트룸을 제외한 일반 객실(33만원 상당)을 1만원에 판매하는 ‘떨이’이벤트를 내놓았다.

한 호텔 관계자는 “그동안 호텔 이미지 관리를 위해 경품 행사를 자제해 왔지만, 사스 공포가 확산된 4월부터 매출이 크게 줄면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유학 업계도 전전긍긍

유통업계에도 사스 한파가 서서히 몰려들고 있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의 쇼핑객이 자주 찾는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시장, 명동 이태원 등에는 최근 눈에 띄게 외국인 고객이 줄었다. 외국인 고객이 전체의 20~30%에 달했다는 동대문 쇼핑몰 밀리오레의 한 상인은 “이라크 전쟁 이후 해외 쇼핑객들이 크게 줄어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사스라는 악재까지 겹쳤다”며 울상을 지었다.

밀집된 좁은 공간에 고객들이 많이 몰리는 백화점 할인점 등의 유통업체나 과천 서울대공원과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 놀이공원도 사스 불똥이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아직까지 백화점 업계에 사스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에 사스 발병 환자가 발생하면 아무래도 매출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수출 중소기업들도 사스 피해에 거의 무방비 상태다. 동남아 지역 수출 상담이 무산돼 손실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엔 사스 의심 지역의 산업연수생 1,000여명의 입국이 지연되면서 가뜩이나 심각한 인력난까지 심화하고 있다.

경기 안산의 한 피혁제조업체 관계자는 “제품 수출이 차질을 빚으면서 일거리가 확연히 줄어든 데다 산업연수생 입국 지연으로 인력난까지 겹쳐 요즘은 기계를 가동시키기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했다.

유학 업계도 초비상이다. 앞으로 사스가 몇 개월 더 지속되면 중국 대학들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는 ‘유학 대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울 이얼싼중국문화원 심정성 과장은 “아직 입학 시즌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 큰 동요는 없지만 몇 개월 뒤에는 유학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학생들도 속출할 수 있다”며 “중국 뿐 아니라 캐나다 어학 연수 등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여서 유학 업계 전체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5/09 09:58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