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경제, 그리고 정치] 盧가 골프장에 간 까닭은?

골프 통한 경기부양 의도, 대통령 라운딩 모습 이례적 공개

대통령이 골프를 쳤다. 5월4일 비서실 참모진, 일부 장관들과 함께. ‘회사 말단 직원들도 골프를 치는 마당에 대통령이 골프를 친 것이 무슨 대수냐’고 흘려 버릴 수도 있을 지극히 ‘범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논란이 됐다. 청와대측의 설명이 결코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경직돼 가고 있는 요즘 같은 때, 대통령이 골프장에 나간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건의해서 이뤄졌다.” 대통령의 라운딩이 침체된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들끓었다. “골프 친다고 소문 내고 치는 X도 처음 봤거니와, 그렇게 하면 서민 경제가 살아난다고 하니 어느 나라에 이런 꼴을 보았는가”(최문곤). “나라에 비싼 녹을 먹고 있는 대통령 시다바리들이 기껏 짜낸 경제 정책이 골프 찬양론인가”(玄峰). “각하 지금이 골프 치실 때입니까. 북핵 문제와 경제 문제로 어려운 이 때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요즘 정말 나라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근심이).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부도 골프를 통한 경기 부양론을 폈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골프장과 룸살롱에서의 접대를 무조건 기업의 접대비 처리에서 제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만 공무상 접대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기업들에게 입증 책임을 더욱 강하게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섭 국세청장이 ‘국세행정혁신방안’을 통해 “골프 등의 접대비를 회사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던 공언이 결국 1개월 만에 ‘없던 일’로 돼 버린 셈이었다.

재경부는 한 발 더 나아가 하반기부터 수도권 골프장 건설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상반기 중 골프장 건설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인 시ㆍ군ㆍ구별 골프장 면적을 임야 면적의 3%로 제한하는 행정 고시를 폐지하고 5%로 확대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지금, 국민들은 정부를 향해 진지하게 묻고 있다. 정말 골프가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를 살릴 ‘구원 투수’가 될 수 있는 것이냐고.


골프는 10조 거대 산업

지난해 국내 골프장을 찾은 사람들은 5년 전인 1998년 830만명의 두 배에 육박하는 1,420만명에 달했다. 골프 인구만도 273만명으로, 국내 성인 10명 중 1명꼴이다. 골프 산업 규모도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99년 1조7,300억원이었던 골프 관련 산업 시장은 지난해 3조원에 육박했다. 165개 전국 골프장의 매출액이 1조6,300억원에 달했고, 골프용품 매출액(7,000억원), 골프연습장 매출액(5,700억원)을 합쳐 2조9,000억원을 넘어섰다.

이 정도만 해도 이미 거대한 산업으로 발돋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이는 골프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최소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선 골프용품(의류 포함) 매출액 7,000억원은 유명 브랜드 제품을 중심으로 한 백화점 매출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중저가 브랜드 매출까지 포함하면 1조5,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골프 회원권 거래 규모도 지난해 2조7,9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골프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 둘 아니다. 골프장 주변의 음식점들은 골프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골프장 설립으로 건설업도 활기를 띠기 마련이다. 2만9,000명에 달하는 국내 골프장의 고용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박세리나 최경주 등 해외파 선수들이 창출해내는 무형의 부가가치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정확히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실제 골프 산업의 경제적 효과는 최소 10조원 이상에 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청와대나 정부의 주장 대로, 우리 나라 골프 산업은 국가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만한 단계에 올라 선 것이 분명한 셈이다.


소비 진작 효과는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 금족령 →골프 산업 침체 →국내 경기 악화 가속’, 혹은 ‘골프 자유화 →골프 산업 활성화 →소비 진작 및 경기 부양’의 시나리오는 다분히 왜곡된 측면이 많다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이다.

지금 골프장은 초만원이다. 매일 1,000여명의 골프 마니아들이 해외로 골프 여행을 떠날 정도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골프장에는 빈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부킹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도 하루 이틀의 푸념이 아니다. 만성적인 수요 과잉 상태다. 법인 고객, 즉 접대 고객이 골프장을 찾지 않는다 해도 골프 산업은 전혀 위축될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LG경제연구원 김기승 연구위원은 “골프 산업은 수요가 공급을 월등히 초과하는 상황이어서 정부가 장려한다고 해서 소비 진작의 효과를 더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정말로 소비 진작이 목적이라면 대통령이 골프를 치는 모습 보다는 재래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골프의 대중화를 통한 경기 부양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법인 고객 수요에 족쇄를 채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인과 공무원이 부킹을 독점함으로써 서민들은 필드에 나설 기회조차 잡기 힘들고, 수요 과잉으로 회원권 가격은 갈수록 폭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골프 경제학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골프는 단순히 산업적 효과 이상의 특수한 경제적 의미를 갖고 있다. 골프가 일찌감치 상류층들만을 위한 ‘사치성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면서 골프장은 기업들에게 은밀한 제2의 사무실 구실을 해왔다.

공무원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 주었고, 공사 수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관공서나 기업에서는 부킹 능력이 업무 능력 평가의 잣대로 평가됐고, 기업 영업 담당 직원에게 골프는 하기 싫어도 무조건 해야 하는 업무의 연장이 됐다.

DJ 정부 초기 공직자들에 대해 ‘골프 금지령’이 풀리면서 골프장의 극심한 부킹 전쟁이 시작된 것은 기업과 공직자간 공생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4월초 이용섭 국세청장이 ‘골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재계가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현재 매출액(수입 금액)의 0.2%까지 접대성 경비로 인정해 세금을 면제해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골프나 룸살롱 등 사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경비는 제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재계는 접대비 총액을 세무 당국이 규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세한 내역까지 간섭을 하게 되면 가뜩이나 기업 활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임원은 “현 정부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운을 뗐다. 그는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사업상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골프 외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만약 인위적으로 억누른다면 과거의 음습한 뇌물 관행이 되살아 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제약사 임원은 “외국처럼 파티 문화가 없는 한국적 풍토에서 술과 골프를 빼면 접대할 방법이 없다”며 “브랜드 가치나 시장 지배력에서 열세에 있는 중소 제약업체들은 문을 닫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소연했다.

골프 업계도 잔뜩 불만을 토로했다. 골프 접대의 손비 처리가 금지된 이후 골프회원권 가격이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하고 골프장들이 속속 도산한 이웃 나라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골프장협회 관계자는 “국내 골프 선수들이 해외에서 국가 이미지를 드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골프를 룸살롱과 똑 같이 취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은밀한 거래를 눈 감아 줘라?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또 재경부가 골프 활성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나선 것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골프의 산업적인 측면 보다는 골프장을 통한 기업들의 이러한 ‘은밀한 거래’를 눈 감아 주겠다는 의도가 더 강해 보인다.

가뜩이나 현 정권의 경제 정책 하나 하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재계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자는 취지도 다분하다는 관측이다.

한양대 나성린 교수는 “현재도 기업들의 접대비는 세법상 손비 인정 한도를 훨씬 초과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우리나라 기업들은 높은 세금을 내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관행상 접대를 급격히 줄이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소비 진작을 내세워 라운딩에 나서면서까지 의도적으로 골프를 장려하려고 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하 경제를 무조건 억누를 경우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 현실적인 골프 접대 관행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단계적으로 타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찬성론자).

“당장 아무런 경제적 효과도 내지 못하면서 기업의 투명성을 저해하는 접대 문화를 오히려 장려하는 것은 재벌 개혁을 후퇴시킬 것이다. 해외에서도 국내 기업들의 신인도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반대론자).

지금 이 순간, 봄 햇살이 빛나는 그린 위에서 티샷을 하며 “굿 샷”을 외치는 ‘접대 골퍼’들은 어쩌면 이렇게 속으로 자부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야.”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5/14 10:43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