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이니셜이 주는 작은 흥분

옛날 초등학교를 다닐 때 화장실에 가면 벽면에 낙서 몇 개씩은 있곤 했다. 제일 흔했던 주제는 ‘철수와 영희는 얼레리 꼴레리 한다’ 류의 스캔들 뉴스였고 그 다음이 ‘철수는 영희를 좋아한다 ’류의 간접 고백 (이 경우는 철수 본인의 자작품일 가능성이 상당히 짙다.

또한 무제한적으로 소문이 확산되길 간절히 바라는 놈이 있다.) 이고 그 다음이 ‘ 000 선생님은 똥개’ 류의 보복성 낙서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하철이나 허름한 식당의 화장실에 낙서들이 있긴 하다. 대개 간접 포르노 풍의 혐의를 숨길 수 없는 음담패설류와 숨막히는 냄새를 참아가면서 열심히 읽는 사람을 단 한 순간에 팍 열받게 만드는 ‘그렇게 할 일 없냐, 바보’ 수준의 허무 시리즈이다.

이런 낙서들의 공통점은 익명성이다. 누가 거기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서 총천연색으로 일필휘지를 날렸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읽는 사람을 즐겁고 짜릿하게 만들고 허무하지만 잠깐 동안이나마 시간 한번 잘 보낸 개운한 느낌을 준다.

거대한 암흑 속에 나를 감추고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가벼운 악의적인 장난과 잔재주를 부려볼 수 있는 게 익명성의 장점이다. 그래서 인터넷 속에서는 그토록 많은 익명의 숨결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컴퓨터 속에 숨어서 어느 한 순간에 변신하는 파워맨처럼 익명이라는 이름 하에 무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익명성은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다. 워낙 분포도가 넓다 보니까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추론의 여지를 가차없이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때때로 하나의 이니셜만을 내세운 익명성 때문에 사람들은 번민한다.

과거 우리는 X양이 누구인가를 놓고 토론과 의심과 얼토당토않은 가설까지 세워가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소문의 그 사건은 변하지도 않는 스토리이건만 당사자인 X양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소문이 분분했다. 도대체 왜 그녀라고 못박혔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녀’라고 지정된 그녀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X양의 그림자 속에서 영원한 멍에를 지고 살아갈 지도 모른다.

신문의 가십난이나 연예인들이 물의를 일으켰을 때 과거에는 순진했던 건지 고의적이었던 건지 조금만 관심있게 추리를 해보면 그 대상인물을 쉽사리 포착해낼 수 있었다. 가령 나를 예로 들면 ‘개그작가 J가 어저께 밥을 먹다가…’ 하는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나를 연상해낼 것이다. 그것처럼 실제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의 앞 이니셜을 속임수 없이 쓰고 몇 마디 힌트를 첨가해주는 식이었다.

나도 신문을 읽다가 이니셜이 등장하는 기사가 나오면 마치 낱말 퍼즐을 푸는 기분으로 그 이니셜에 맞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면서 소문의 그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해 보곤 했었다.

마치 진짜로 이름을 쓰기는 좀 뭐하니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누구든지 금방 짐작할 수 있게끔 이니셜을 사용하는데 사람들의 눈치가 너무 빨라지니까 때로는 전혀 다른 익명의 이니셜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냥 탤런트 모양, 영화배우 모씨라고 하기도 하고 나처럼 그냥 무조건 A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쓰는 사람들은 마치 숨박꼭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요리조리 꼬랑지를 감추는데도 읽는 사람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도 엮어댄다. O 양이라고 하면 금방 몇 명의 이름이 올랐다가 이틀도 안돼서 한명으로 압축되고 그러고도 분위기 파악을 못해서 인터넷에다가 ‘도대체 O양이 누구예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바보냐고 비아냥 거린다.

X양, O양, H양이 시간 많고 의심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더니 이제는 S양이 누구인가를 놓고 시끄럽다. 자, 소문의 S양이 누구냐면 으흠 지금 떠오르는 인물이 신카나리아, 선우용녀, 심수봉…. 이 그룹은 너무 나이가 많고….

입력시간 2003/05/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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