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으로 버틴 무명의 세월

트로트 가수 박재권, 27년만에 감격의 첫 CD 제작

음악 경력 30년을 넘기기 전 빛을 본 첫 CD다. 올해로 정확히 데뷔 27년을 맞는 트로트 가수 박재권(47)이 발표한 앨범 ‘사랑 자동 판매기’는 방방곡곡의 카바레 무대에서 다져진 경륜이 물씬 풍 겨져 나온다(세원음반).

꺾고 돌리고 비틀어 내지르는 목청은 트로트 가수의 정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다부진 몸매에서 우러 나오는 제스처와 우락부락한 눈매는 해방 정국 서울의 밤거리를 사로 잡던 어깨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젠 좀 떠야죠.”

하루가 멀다 하고 만들어져 나오는 가수들이 뜨고 진다. 반짝 스타라는 이름의 그들. 그러나 그의 말에서는 어떻게 대박 한번 터뜨려 보겠다는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무명의 세월이었지만,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숱한 무대의 경험에서 뼈대 굵은 자의 느긋함이 있다. 거기에 자신을 최고로 믿어 주는 아내와 두 딸이 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다행스럽게 반응도 온다. 타이틀 곡 ‘사랑 자동 판매기’는 2월 21일 전파를 처음 탄 이래 KBS2 라디오의 ‘트로트 가요 앨범’(진행 김보화) 등의 프로에서 종종 방송되고 있다.

“불만 있나, 못 마땅하나, 후회하나.” 자신을 뒷바라지 하느라 곱던 얼굴의 조강지처한테 버릇처럼 하던 말이 이번에는 경쾌한 트로트 선율에 얹혀 나온다. 주특기인 코믹 트로트다.

“작년 7월 테이프 메들리 앨범 ‘새 바람 미스터 박’의 녹음 작업 중 갑자기 악상이 떠 올랐죠.”

그 때가 하필이면 새벽 2시. 잠자리에 들려던 그는 바로 머리맡의 악보를 찾아 일사천리로 그려 나 갔다. 내친김에 가사까지 붙였다. 지금까지 100여곡을 쓰고, 그 중 15곡은 가사까지 직접 썼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셈이다. 이밖에 인기 트로트 작곡가 이호섭이 쓴 ‘사연’ 역시 박씨가 강력 추천하는 곡.

1994년 ‘대발이 메들리’를 필두로, 이듬해‘코러스 메들리’를 낸 그는 2003년‘새 바람 미스터 박’을 발표했다. 공백을 메꾸듯, 이번에는 메들리의 1집과 2집은 물론 첫 CD까지 동시 발표한 것이 다. 테이프 제작비로는 1,000만원이 들었지만, CD는 3,000만원이다. 그러나 이 CD는 일반 매장에 없다. 아직은 방송용이기 때문이다. “4년째 알고 지내는 송대관씨가 내 재능이 아깝다며 강력히 권해서 만든 CD죠.”


영락없는 무대 체질

그는 트로트 메들리와 쇼 무대 현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혼자서 안 하는 게 없다.

‘새 바람…’의 경우, 연주(키보드), 편곡, 노래, 코러스, 만담까지 다 했다. 무대에서는 한술 더 뜬다.

김대중, 김종필, 정주영 등 이름 있는 사람들을 흉내낼 때는 신들린 자가 된다.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무대에만 올라가면 딴 사람이 돼죠.”

1985년까지, 그는 말하자면 투잡스족이었다. 안동 카톨릭 상지대 응용미술과 77학번인 그는 졸업 후 서울 디자인 사무실에 취직해 건축 모형 작업에 종사했다. 동시에 캬바레 등지에 나가 노래 부르는 생활도 이어졌던 것.

그가 야간업소와 작곡 등 음악에만 전념한 것은 결혼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재직 시절 여직원의 소개로 알게돼 2년 넘게 동거해 오고 있던 공현주(44)씨와 한 이불밑에 살게 되자 가장이 된 것.

“허리띠 졸라 매고 산” 그는 결혼 3년만에 28평형 빌라를 3,400만원에 마련할 수 있었다. “돈 쓸 시간이 없었어요.”

힘들게 살았지만 그는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한다. 함께 지방 공연에 가게 된 백남봉이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절룩거리며 무대에 서는 것을 본 그는 호텔 객실로 찾아 올라가 자초자종을 물은 뒤 치료해 주었다.

이번에 CD까지 만들게 된 것은 가까이 지내던 송대관이 “무명을 면하려면 방송하라”는 충고를 해 준 것이 직접 계기였다.

민정(21ㆍ경희대1)과 민주(13ㆍ초등6) 등 딸 둘을 뒀다.“아들 보려고 제딴에는 고르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2년째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김위한ㆍ72)의 소원이 손자 하나 보는 거라서…” 자신이 3대 독자이다 보니 노모의 염원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훤히 아는 그는 번듯한 가수가 된 아들의 모습을 더욱 보여드리고 싶을 뿐이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2003/05/1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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