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대란' 불씨 키우기?

위기 대처능력에 구멍, 물류업계 왜곡된 구조개선 급선무

근로자의 날이 지나기가 무섭게 경북 포항과 경남 지역 화물연대 파업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사상 초유의 물류대란은 5월15일 부산지부의 파업 철회로 근 2주일만에 마무리됐다. 이제는 적체됐던 컨테이너 화물까지 대부분 처리되면서 겉으로는 파업 이전으로 돌아간 분위기다.

그러나 불씨는 내연하고 있다. 화물차업계의 왜곡된 체제 개선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란’분출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정부가 두산중공업, 철도노조, 화물연대의 잇따른 벼랑 끝 전술에 거듭 백기를 든 탓이다.

여기에 공권력 투입 카드의 활용이 어려워지면서 정부의 취약한 위기 대처 능력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한 켠에선 정부의 친 노조 성향에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낸다. 화물연대 파업은 끝났지만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숙제를 남긴 셈이다.


안일한 정부, 뒤늦게 허둥지둥

화물연대 파업은 물류업계의 왜곡된 구조를 수 십년 방치한 역대 정부의 무대책에서 출발한다. 지입제, 다단계 알선 등 화물차 운전자의 고혈을 빠는 고질적 문제점이 끊임없이 거론됐지만 정부는 1995년, 99년 지입제 폐지 약속을 거듭 어기는 등 문제를 키웠다.

97년 환란 이후 퇴직자들이 대거 화물운송업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한층 악화됐다. 2001년까지 화물차량은 55% 늘었지만 같은 기간 육상 화물량은 9%만 증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화물차 운전자들의 생존권을 건 선택은 바로 화물연대 구성 등 집단행동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4월 초 이들의 장관 면담 요구를 거절하는 등 변화된 지형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4월 말 건교부가 실무협상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정부 모든 부처가 5월6일 노무현 대통령의 질책이 있기 전까지 포항 등에서 발생한 집단행동 돌입을 까맣게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 관계자는 “지자체의 보고가 없었다고 하지만 지부 차원에서 투쟁에 들어갈 수 있다는 특성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정부의 이후 대처는 한심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합상황실은 11일에야 행자부에 설치됐고 그나마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대책이나 진행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면 사태 해결이 어려워진다며 관련 부처들이 보고를 하지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합동상황실 임무는 상황 파악에 더해 대책 수립 기능도 해야 하는데 행자부에게 맡긴 것부터 무리였다”고 지적했다.


흔들린 법과 원칙, 부처간 책임 떠넘기기도

화물연대 파업은 급기야 전국으로 번지고 산업의 마비 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관계 장관들은 회의장에서 추상적인 논의만 벌였다. 13일 국무회의가 대표적 예다. 장관들은 사태 해결 방안보다는 화물연대 파업의 성격 등을 놓고 한가한 소리만 늘어 놓았다.

최종찬 건교장관 정도가 “더 힘든 계층도 있는 만큼 형평성 있게 대응해야 한다”고 법과 원칙을 주장했을 뿐, 대부분 “소수 여론은 참여정부의 노동정책 기조가 과거와 달라진 게 뭐냐고 묻고 있다”는 식이었다. 공권력 행사 기준에 대해 국정홍보처장과 부산경찰청장의 해석이 엇갈리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을 연출, 공권력 행사 의지가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기까지 했다.

소관부처를 따지는 면피성 행태는 14일 부산에 몰려간 장관들이 서로 책임을 떠 넘기면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15일 최 건교장관이 국회 건교위원과 고건 총리에게 사퇴 의사를 밝힌 것도 이 같은 장관들의 태도와 정부의 대폭 양보에 대한 불만이 터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참여정부 내각의 친 노동 성향과 인적 구성이 근본 문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 기업 관계자는 “정부의 일방적 양보도 문제지만 내각의 친 노동 성향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고 말했다. “소신과 다르더라도 법과 원칙을 주장해야 할 법무장관부터 공권력 행사에 유보적 반응을 보이는 판에 누가 노 대통령의 친 노동 ‘코드’를 어겨가며 딴 소리를 내겠느냐”고도 했다.

화물연대는 5일간의 부산지부 파업으로만 3억4,500만달러(관세청)~5억4,000만달러(무역협회)의 손실을 가져 왔다. 또 화물차 경유가 보조를 위해 올해에만 900억원의 혈세가 들어간다.


형편성 내세운 노동계 ‘연대’ 움직임

더욱 큰 문제는 노동계와 사회 각 집단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벌써 노동계의 파업 예고가 줄지어 나오고, 버스와 택시업계, 레미콘 운전자들도 ‘형평성’을 내세워 들썩이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모두 노사문제로 접근하려는 기대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경총의 성명은 그런 점에서 음미할 만하다.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을 계기로 국가 차원의 위기해결 시스템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 대응을 하나하나 평가해 보면 향후 줄 이을 각계의 다양한 요구와 실력 행사에 제대로 대처해 낼지 의문이다.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을 충돌 없이 봉합했다.

그러나 정부는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익 대분출과 집단행동의 시대가 막을 올리고 있다.

안준현 기자

입력시간 2003/05/20 16:13


안준현 dejavu@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