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곡예사 김영희

그녀의 존재 이유는 '우리한국서커스' 있음에
눈물로 점철된 30년 서커스 인생, 우리시대 마지막 女곡예사

장날이다. 일곱 살짜리 소녀의 마음은 벌써 장터 마당에 어마어마하게 큰 천막을 휘날리며 서 있는 곡마단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누구는 내년이면 학교에 간다고 ㄱ ㄴ을 배운다지만 소녀에게 학교는 곡마단보다 더 멀고 아득한 곳이었다. 그래도 소녀는 운이 좋았다. 곡마단에서 또래를 만났고 그 아이들은 소녀에게 신기한 재주를 가르쳐주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소녀는 장날이 아닌 날도 그 친구들과 놀고 싶어졌다. 장날을 기다리다 지친 어느 화창한 봄날, 소녀는 곡마단을 따라 집을 떠났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기억 속의 곡마단조차 희미해진 지금 그 때의 그 소녀를 다시 만났다. 한국 서커스 최후의 보루 김영희(동춘 서커스단 소속 곡예사)라는 이름으로.


힘들고 고된 곡예사 수업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되는 그녀를 위해 오빠가 가짜 증인이 돼주었다. 입단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단을 하고 나서도 바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배우고 싶은데, 맨날 심부름만 시키고 안 가르쳐 주더라구요.

그러니 또래끼리 무대 밑에서 가마니 깔고 놀고, 거꾸로 한번 서보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 그 애들이 자매였는데, 둘 다 가버렸어요. 딴 데 스카우트 되서 돈 더 받고. 걔들이 가고 나니 아크로바트(허리꺾는 곡예)를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당시엔 아크로바트가 반응이 좋았거든요. 나이 드신 분들은 허리를 꺾는다는 그 자체를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식초를 물에 타 먹는다느니, 뼈가 없거나 물렁할 거라느니 하면서 할머니들은 막 만져도 보고(웃음). 그런데 걔들이 없으니 큰일이 난 거죠. 그래서 내가 한번 해볼게요, 했더니 ‘이 가시나야, 니가 연습도 안 하고 어떻게 하냐’는 거예요.”

그러나 단원들 중에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꾸준히 동작들을 해보곤 하던 그녀를 눈 여겨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회는 그렇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 동안 혼자 연습해온 몇 가지 동작을 처음으로 선보였고, 합격점을 받아냈다.

“일단 흉내는 내니까(웃음). 내보내 보기로 하고 화장을 시켜주고, 잘해야 된다면서 마음도 안정시켜주고. 그 옛날에는 보석 같은 게 귀하잖아요. 근데 목걸이 같은 거 해주고 하니까 무대에 나가서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 기분이 땡이지 뭐(웃음).”

첫 무대를 치르고 나자 비로소 그녀에게도 배움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여덟 살짜리 신입단원은 매일 한밤중에 일어나 도구들을 정리하고 모닥불을 피워, 새벽 4시에 모든 단원이 연습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연습을 하면 기초단계부터 하는데, 그게 끝나고 나면 연습과정이 힘들죠.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이 나죠. 연습을 거쳐 무대 나가고, 또 연습하고…. 네 시간 정도 잠자는 거 말고는 거의 다 연습이었어요. 하면 할수록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했어요. 더 난이도가 있는 걸 해야 되니까.

물구나무서기는 오래 서 있어야 되고, 턱걸이는 한번에 몇 십 개씩 해야 되는데, 20개 했으면 40개, 그 다음은 60개, 또 80개 하는 식으로 점점 훈련량을 늘려야 했어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인데 가장 힘든 과정이었어요. 몸에 막 쥐가 날 정도예요.

왜 내가 서커스를 배웠나 싶고, 근데 어차피 배웠으니까 제대로 해야 되잖아요. 그래 선생님 두고 봐라 싶기도 하고,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훈련을) 시키니까. 근데 제가 (연습을)완수하고 무대에서 다른 곡예사 못지않게 하게 되니까, 선생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선생님이 뭣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심하게 가르쳤는지.”

외출할 일도, 시간도 없지만 어쩌다 목욕이라도 갈라치면 선생님이 꼭 같이 가고, 길을 걸을 때도 땅만 쳐다보고 걷고, 이부자리 빨고 풀 먹여 갈무리하여 개는 법까지 배울 만큼 규율도 엄했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선생님의 호통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이 놈의 가시나야, 재주 배워갖고 나 먹여 살릴 기가? 배워놓으면 다, 니 재산인데, 한 가지를 배워도 제대로 해야 될 거 아이가?’


난, 한국 서커스도 조금씩 발전할 줄 알았어….

중장년층들은 서커스단이 아니라 곡마단이란 이름으로 기억한다. 긴 겨울 부모님을 졸라 겨우 들어간 천막 안에서 자주 급해지던 용변 때문에 천막사이로 기어나가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고 오면 가마니 한 장 깔린 땅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냉기와 공연 끝나고 돌아오는 길을 후끈 달구던 이상한 열기를 기억한다.

“그때는 어려웠잖아요. 요새야 좋은 장비가 많이 나오고 하지만. 또 그때는 시설을 개울가에 많이 했어요. 장마철에는 떠내려가고, 그 비참함을 안 겪어봐서 몰라요. 그걸 보는 순간에 얼마나 눈물이 나고 떠내려가는 걸 그 추운데, 개울 10 리, 30리 걸어 하나하나 다 주워오고, 혹시 걸린 게 있을까 싶어서. 그때는 비가 조금만 와도 다 떠내려가는데, 안 떠내려 보내려고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가고.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그 겨울철에 눈보라, 비바람 쳐보세요, 얼마나 추워요. 불과 10년, 15년 전이에요. 비바람 칠 때 포장 하나라도 안 찢기고, 안 날리려고 모든 식구들이 다 비상이에요. 지금은 이렇게 포장이 가만있지만 그땐 펄럭거리고, 바람 쌩쌩 들어오면 온 몸이 꽁꽁 얼고, 줄 타고 할 때, 온 몸이 얼마나 추운지. 손님이라도 많으면 몰라, 열 한 댓 명 있어, 어떨 때는 그것도 안 되는 것 같애. 얼마나 추운지 진짜로 이 몸이, 다리가, 살이 감각이 없는 거야.

그리고 이 타이즈도 촉감이 차가운 거야, 나일론이라서. 얼마나 추운지 줄타기하려고 파이프를 잡으니 쇠파이프는 쩍쩍 달라붙지, 포장 사이로 바람은 들어오지. 그러면 울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옆에 있는 오빠들이 얼른얼른 하고 내려가자, 춥다 달래고. 높으니까, 손님들 잘 안 보여요. 울고불고 하는 건. 돌아서서 울고 닦고 또 나가는 거예요.

그래도 어렸을 때는 내 시대가 지나면 서커스도 뭔가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을 했죠. 근데 생각 외로 빨리빨리 안 되는 거 같아요. 빨리빨리는 안 되도 좋은데, 어느 정도는 되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늦는 거 같아요.”

며칠, 몇 달을 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다. 쇠기둥하나, 천막 한 쪼가리 어디 하나 그의 손길과 눈물이 엉기지 않은 곳이 없는 한국서커스의 본체 천막은 그의 인생 전체를 에우고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30년을 넘게 하는 동안 그만두고 싶은 때인들 왜 없었을까.

“한 서른쯤 됐을 땐가.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한국곡예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정도 최고라는 걸 항상 가지고 있었죠. 내가 최고다가 아니라, 내가 이 서커스에 열심히, 최선을 다 하면 언젠가는 우리 한국서커스도 발전이 있고, 어딘가에서 도움을 주셔서 다른 연예인들처럼 대우를 받는 그런 때가 오겠지하고 생각했지요. 근데 어떻게 된 건지 점점 이래요. 내가 제일 창피한 게 언젠지 아세요? 일본교포분이 많이 와요.

옛날 서커스를 보고 크다가 일본에 들어가셨던 분들이. 그분들 말씀이, 실망했다고. 나는 우리 한국서커스가 못 해서 실망했다고 그러는 줄 알고, 아니, 왜요? 했더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이 됐냐? 근데 이게 뭐냐 우리 한국서커스, 이것도 하나의 예술인데, 이게 뭐냐고. 우리 생활하는 거 다 보고 너무 안타깝다며, 우리 한국 아직 멀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또 전 세계 서커스만 찍고 다니는 러시아분(잡지사 기자)이 있는데 한국말을 조금 해요. 한국서커스 이거 너무너무 불쌍하고 구질하다는 뜻으로 물어요. 그럼 어떻게 답해요? 정말 계속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만두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좋은 음식솜씨를 밑천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묘기를 사랑하는 그에게 곡예사 이외의 삶은 아무 것도 거둬들일 수 없는 황무지만 같았다.

“사회에 나가 있으면 그래요, 비바람 쳐도 그렇고, 날씨 좋으면 좋은 대로 또 아유, 손님 많겠다, 박수 받는 그게 그렇게 생각나고 해서 장사도 잘 못하겠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고생하는 과정, 묘기연습 과정, 나이 드신 분들 돌아가셔서 다 같이 묻어주고, 어린 저를 목마 태우고 같이 야유회도 가고 하던 걸 다 같이 겪어서 그런지도 몰라요.”

인터뷰 도중 공연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가 안절부절 이다. 무대가 부르는 것이다. 무대가 있는 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는 절대 그 부름을 저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저는 이게 지금도 좋아. 아직 더 배우고 싶고, 잘 하고 싶어요. 여기서 사람을 겪다 보니까 사람이 미울 때는 있어도, 이 서커스 안에서 묘기하는 자체를 난 사랑해요. 진짜 난 이 서커스를 존경해요.”


우리 한국서커스를 살릴 방법은 없을까요?

포장마차를 할 때 만난 남편이 그를 찾아 서커스단으로 찾아왔다. 그에게는 첫 남자였고, 아버지 같은 단장님의 믿을 만하다는 말에 같이 살면서 아들을 얻었다. 아이의 사진이 걸려있는 컨테이너 방에서 인터뷰 하는 내내 그는 ‘우리 한국서커스’라는 말을 입에 달았다.

“그래도 그 추운데 발 동동 구르며 들어오시는 관객들이 있었으니까 그 맥을 이어올 수가 있었죠. 그분들 덕에 그래도 요만큼의 한국서커스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봐요.”

필자가 찾아간 날도 ‘동춘서커스’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멀리 동두천에서 부천까지 온 노부부가 있었다. 어릴 때 보고 크던 거라 아쉽다고. 부지불식간에 살아온 날들의 일부를 서커스와 함께 완전히 잃어버릴 위기에 놓여있다. 김씨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한국서커스’를 살리기 위해 요즘 많이들 하는 ‘데모’까지 생각한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한국에 서커스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도 서커스가 공연되고 있고 그 천막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잊었을 뿐. “우리 한국서커스가 아직 살아있어요!”

양은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5/2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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