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다] 장회익 녹색대학 총장

과학의 인간화를 탐색하는 녹색세상, 국내 첫 대안 대학

백두대간이 남녘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터전에는 숲을 닮은 사람들이 흙과 함께 살고 있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 청미래 마을의 여름은 녹색 대학이 있어 더욱 싱싱하다.

이곳의 주민, 아니 첫 입학생 36명은 대자연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태철학과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운다. 고교 과정 이수 학력자들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서울 지역 출신이 가장 많고, 그밖에 영남-호남-강원-충청 등 전국의 인구 비율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들이 밤을 새워 가며 두런두런 토론하는 것은 백두대간학일 수도, 환경 과학일 수도 있다. 그들 사이에서 토론 진행을 돕고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의 석학과 만나게 된다. 유달리 형형하고 깊은 눈매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이치를 실천하는 초대 총장 장회익(65) 교수가 거기 있다.

5월 28일, 선생은 녹색대학 이사회 참석차 서울에 왔다. 한 달에 한번씩 함양과 서울을 번갈아 가며 열리고 있는 운영 회의다. 회의를 끝낸 선생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녹색대학 서울사무국 및 후원회’에 들러 젊은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음날 녹색대학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3월 3일 개교한 녹색대학은 국내 최초의 대안 대학이다. 무한 욕망을 좇는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거부하고 대안적인 삶과 교육의 방식을 모색한다. 교수와 학생이 아닌, ‘샘’과 ‘물’이 함께 살며 정규 교과 과정이 무시해 온 앎의 세계를 탐색한다.

녹색문화학, 생태건축학, 풍수풍류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등 5개 과목이, 이를 테면 학부 전공 과목이다. 대학원 과정에서는 생태건축학과, 한국의 교사 양성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녹색교육학과, 침구학 등 치료보다 치유에 초점을 맞추는 자연의학과 등 3개 학과가 개설돼 있다.

강사진은 시쳇말로 초일류급이다. 장 총장을 비롯해 최창조(풍수연구가), 허병섭 목사(신학), 이정수 철학 아카데미 원장(철학) 등 정규 샘이 10명. 그때 그때 초청해 특강을 듣는 ‘초빙 샘’ 등 둘로 나뉜다. 시인 김지하와 박노해, 인간문화재 이애주 등이 그 예다. 이 모두가 녹색대학을 자라게 하는 힘이다.

‘녹지사(녹색 대학을 지탱하는 사람들)’ 회원 1,800여명이 ‘땅 한평 사기’ 등의 운동으로 매월 1만원씩 기부해 모은 돈 2억9,000만원으로 지난해 인수한 폐교(백전중)를 3개월 동안 수리해 4,500평 부지의 녹색대학으로 거듭 탄생시킨 것이다. 2층짜리 건물에 강의실이 5개, 세미나실이 1개의 학교에서 녹색 세상의 꿈이 영글어 간다.


나이 27년차도 똑 같은 푸른 꿈

4월 4일~6일 열렸던 창립 축제를 빛낸 사람 가운데는 충남 금산군 김행기 군수도 있었다. 금산군 전체를 생태 공원화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데, 녹색대학으로부터 배워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금산군은 이어 ‘금산의 산꽃축제’에 녹색대학측을 초청, 저녁에는 군내 휴양림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학생들의 나이는 지역적 편차보다 더 들쑥날쑥하다. 20~40대가 한 교실에 모여 삶과 우주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정규 교과서라는 획일적 사고의 틀은 절대 금기다.

“학생다운 싱싱한 아이디어가 샘 솟죠. 자신이 이해한 만큼만 쓰게 하니까요.” 격식에 얽매인 아카데미 강좌식 수업은 장 교수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 문과 계열 출신이 대부분인 학생들은 어려운 수학을 생활속의 사물이나 현상과 비겨 설명하는 이곳 ‘샘’들의 수업 방식 덕분에, 이전에는 아득하기만 했던 신천지로 어느덧 쓱 들어서게 된다.

중학교까지 마치고 고교 과정은 검정 고시로 이수한 박종민(20) 같은 학생은 장 교수에게 항상 기쁨을 안겨준다. 제도 교육 체계 내에서의 종민씨는 수식과 이론만이 가득한 물리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사물을 나름대로 깊이 보고 글로 옮기는 데 재주가 많은 그는 이곳에서 장 교수의 특수상대성 강의를 듣고는, A4 용지 7매에 그 어려운 이론을 자기 식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이다.

“과학지에 소개해도 좋을 내용”이라고 장 교수는 전했다. 장 교수는 녹색대학의 수업을 가리켜 “학생다운 싱싱한 아이디어의 향연”이라고 요약한다. 교과서를 벗어난, 정답을 내지 못 할 발상이라면 무조건 못질을 해 대고 보는 정규 학교라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현재 이 학교에서는 18세의 최연소 학생이 47세의 최고령 학생과 나란히 공부한다. 굳이 서울대와 견주자면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수업이란 점에서 다르고, 내용적으로는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같다.

그는 “물리학과 석사학 수준의 이론을 가르친다”고 소개했다. 그가 가장 반기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지적 수준에 솔직한 글이다. 가장 싫어 하는 것은 자료를 뒤져 인용한, 아카데미적 글쓰기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자신만의 언어를 써서, 자신이 이해한 만큼, 논리적으로 엮어 내는 방식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베낀 글은 이 노련한 학자에게 여지 없이 지적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오전 8시에 시작한 강의는 오후 2~3시면 일단 끝난다. 이후는 학교 주변의 땅에 심어진 채소 등을 돌보거나 풍물 등 동아리 활동을 갖는다.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니 너무 친해져서 걱정이예요. 서로 부를 때는 아예 ‘왕언니’나 ‘오빠’식이죠.” 점심과 저녁을 지어 주는 동네 아주머니는 당연히 ‘어머니’가 된다. 식단은 이들이 직접 가꾼 소채류, 즉 100% 유기 농산물이다. 동물성은 멸치나 생선 토막, 아주 가끔씩 나오는 육류가 전부다. 외부 손님에게는 한끼에 2,500원의 밥값을 받는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저녁 7시부터 두세 시간 짜리 수업을 다시 진행한다. 철학이나 물리학적 주제로 자유로이 토론을 나눈다. 그는 강의 전, 조교로부터 그가 가르칠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새겨 듣는다.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강의를 하기 위한 사전 점검이다. “내가 그 동안 대학서 했던 강의가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죠. 그러나 서울대에서 강의할 때는 학생이 얼마나 이해할까란 문제는 안중에 없었어요.”


몸으로 실천하는 현대 과학의 화두

장 총장이 진정한 대안 대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권내 대학과의 결별이 먼저 필요했다. 1971년이래 물리학 교수로 재직해 온 서울대에서 물리학과 석사 과정 교육을 그만 두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녹색대학 초대 총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대안대학의 꿈은 91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돼, 기금 모금 등으로 구체화돼 온 바다. 꼬방동네로 유명한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 독일서 환경과학을 공부한 한광용 박사(현재 녹색대학 교무처장), 귀농운동본부장 이병철씨 등과 함께 대안대학이라는 미증유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논의했다.

93년 그가 ‘과학사상’ 겨울호에서 ‘생명 문제의 문명사적 의의’라는 권두 논문을 통해 지구 생태계내 생명의 문제를 본격 제기했을 당시만 해도 장 총장은 일반의 눈에는 별난 자연과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90년 ‘과학과 메타 과학’(지식산업사刊)을 기점으로 해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아 왔던 터다.

특히 98년의 ‘삶과 온생명’(솔刊)은 서양과학과 동양사상의 변증법적 통합을 제시한 저작으로 기록된다. 그의 사상이 응축된 ‘온생명 사상’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88년 유고에서 열린 과학철학학회를 통해서였다.

여전히 그는 예외적 존재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세계적 추이이기도 했다. 물리학자가 생명 현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가장 특징적 양상이다. 1950년 생명의 본질인 DNA를 발견하고 해명해 낸 사람은 물리학자 크릭이었다는 사실은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다.

크릭을 감명시킨 것은 양자 물리학자인 슈뢰딩거가 쓴 걸작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였다. 장 총장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물리학에서 시작해 생명을 논리적으로 파고 들더니 생태계 전체에까지 다다른 것은 어쩌면 논리적 필연이이다.

장 총장의 행보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에 대한 하나의 확실하고 검증 가능한 해답이다. 그는 전문화ㆍ세련화의 옹벽에 갇혀 있는 우리 시대 자연 과학도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는 신무기 제조술의 결과였다. 이라크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최신 무기를 개발한 대가로 최신 과학 기술은 윤택해 가고 있지는 않은가를 녹색대학은 묻고 있다.


국가 인가는 약인가, 독인가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보면 학문의 세계, 특히 첨단 과학일수록 고도로 전문화돼 상대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지는 모습이 일반이다.

장 총장이 5월 ‘동서양의 사유 전통과 인문학’이라는 논문을 김우창(고려대 영문과), 이태수ㆍ김상환ㆍ정호근(서울대 철학과) 교수 등 동료 교수와의 공동 저작물인 ‘삶, 반성, 인문학’(태학사刊)의 권두에 실은 것은 총체적 인식의 당위성을 동양 인문학의 관점에서 제시하기 위해서다. 거기서 그는 자연과학, 특히 기술 만능주의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 과학은 세분화와 전문화가 끊임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심각성은 위기를 겪고 있는 인문학과는 비교도 안 된다. 실제로 과학 분야의 일선에서 작업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 활동이 학문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의가 어떤 것인 지에 대한 생각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른바 가시적인 성과를 생산하는 데 급급하다.’

그는 “자본의 부속품으로 사용될 학생들을 마구 찍어내는 공장으로 전락한 대학을 생명체로서의 대학으로 회생시키는 것”으로 녹색대학의 개교 이념을 밝혔다. 염불보다 젯밥(등록금 장사)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우리의 대학 관계자들이 들으면 몹시 뜨끔해 할 지적이다.

언제까지 권외(圈外)에 있을 것인가? 장 총장은 “대학준칙(準則)주의에 따라 대학이 인가제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인가를 받으면 기본적 질은 국가에서 보증해주므로 사회적 공신력이 커진다는 이점이 있다”며 “그러나 학점, 교수 시간, 성적 산출 방식 등에 대한 조건이 까다로워 인가의 여부는 현재 학교 운영단 최대의 쟁점”이라고 밝혔다.

형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간섭을 감내할 것인 지를 두고 회의가 한창이다. 당장 제일 아쉬운 게 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재정적 문제, 시설과 프로그램 확충 문제”라고 답했다.

녹색대학은 열린 대학이다. 소비만을 부추기는 현란한 후기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삶의 방식이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럼에도 현실적 문제는 여전히 골칫거리다.

녹색대학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다. 시비와 객토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유양옥의 현대적 민속화, 임옥상의 민중화, 시인 김지하가 그린 수묵란화 등 열성 후원자들의 작품을 모아 6월 중으로 벌일 녹색대학 기금 마련 작품전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위선과 허위가 없는 보다 나은 시대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녹색대학은 늘푸름의 정신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녹색대학 후원회 02-337-8100. 홈 페이지 www.ngu.or.kr.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3/06/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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