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온건세력과 강경세력

”북한은 먼저 핵을 포기하고 국제적 사찰을 수용한 뒤에 체제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여러 번 기회를 놓쳐 안타깝다. 서울 답방도 실행 했어야 했다. 남한 내 ‘온건세력’의 입지를 곤란하게 하니 안타깝다.” “최근의 한반도 위기에는 북한측의 책임이 크다. 북한과 잘 하겠다는 남쪽 사람들을 궁지에 몰고… 그래서 북한에 반대한 ‘강격 세력’에 구실을 주고…”

6ㆍ15 남북 공동선언 3주년을 맞아, 김대중 전 대통령이 15일 저녁 KBS와의 퇴임후 첫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퇴임후 3월 중순께 나온 451쪽짜리 책 ‘대한민국이 金大中을 고발한다’를 읽어 보았을까. 월간조선이 5년 단독 추적해 펴냈다는 책이다. 이 잡지의 편집장 조갑제가 쓴 “대한민국엔 불리하고 민족반역자 주적에겐 유리한 행동의 일관성 연구”, “김대중의 반역적 범죄혐의 50대 사례”를 읽어 보았을까.

조 편집장이 결론 내린 김대중 대통령의 독특한 어법 12가지는 속으로 분노하되 겉으로 웃으며 읽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스스로 칭하지만 비자금 모집, 친인척의 부패 등 기존 정치판의 부패 관습을 추종 확대함으로써 ‘행동하는 욕심’이 되어 버렸다. △그는 북방 한계선을 지키되 먼저 쏘지 말라고 지시하여 사실상 지킬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햇볕정책의 제일원칙을 안보철저를 내세웠으나 흡수통일 반대를 또 다른 원칙으로 제시함으로써 안보를 약화시켰다. △냉전 구조의 해체를 주장했으나 실제로 벌여 나간 일들을 보면 대한민국 해체, 북한의 냉전구조 존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그는 ‘자기편 사람들’에게 자신의 통일 방안을 갖고 가서 김정일과 합의해 놓았다고 자랑한 다음날, 야당 당수에겐 노태우식 통일 방안과 합의 했다고 변명했다. 약속을 안 지키는 것과 거짓말은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우회전 깜박이를 켜면서 좌회전 하는 사람인가. 물론 조갑제 편집장이 겨냥한 것은 DJ 대통령의 ‘자기편 사람들’이 아니고, 북한에 반대하는 ‘강경세력’인 게 분명하다. 그럼 남한내 ‘온건세력’은 어디에 있는가. DJ를 결사옹호 하는 이름을 거명할 정도의 ‘자기편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멀리서 오는 것일까. 독일 연방의회 독한의원친선협회 회장 하르트무트 코쉭이 퇴임 직전(7월 중순)에 엮어 낸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이하 만남)’이란 책은 DJ의 자기편, ‘온건세력’의 참 마음을 적어 놓은 것 같다.

이 책에는 요하네스 라우 독일 연방대통령등 20명의 정치인과, 학자들이 ‘정치지도자 이자 열정적인 민주투사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회고와 찬사를 썼다. 작년 월드컵 때 서울에 온 라우 대통령은 만찬사에서 말했다. “대통령님의 ‘햇볕정책’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비교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대통령님의 노력이 독일 동방정책의 시작과 비견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라우는 DJ를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했다. 또 DJ의 가까운 독일 친구로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연방대통령, 한스ㆍ디트리히 겐셔 전 외무장관을 지명 했다.

통일 독일을 이루는데 큰 역을 한 겐셔 전 외무장관은 DJ와의 인연을 그가 구속되었을 때 만난 이후 긴 인연이었다고 회고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조국 한국에는 큰 행운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의 희망이었다. 김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할 때처럼 모두가 그토록 이견없이 수상자 선정에 동의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는 찬사를 썼다.

‘만남’을 엮은 콕스 의원은 DJ가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 중 동병상린(同病相燐)이란 격언을 풀이하면서 시작된 ‘햇볕정책’은 1970년대 브란트의 ‘접근을 통한 점진적 변화’라는 동방정책의 요체를 이어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접근을 통한 점진적 변화’라는 대동독 정책이 갖는 의미와 성과에 대해서는 현재 독일의 정치계, 학계, 및 언론계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드러났듯, 통일에 대한 생각을 소홀히 하고 의도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 주역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단지 방관자로 머물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라는 견해는 DJ 햇볕정책에 많은 이들이 참여할 것을 바라는 실질적 호소문이다.

함부르크 대학 일본학과 교수 만프래드 폴은 ‘햇볕정책이외 대안 없다”는 긴 논문 역시 비슷한 주장이다. “햇볕정책은 그 자체로써 합리적인 정책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대외 정책상 유일한 현실 방안이다. 후임 대통령도 포기 할 수 없을 것이다.”

후임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 ‘온건’, ‘자기 편’, ‘남의 편’ 따지기 전에 멀리서 온 책, ‘만남’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입력시간 2003/06/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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