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보조금', 소비자와 정통부는 바보?

금액 다른 계약서, 할부강요 등 편법판매 기승

“얼마까지 보고 오셨어요?” 흥정을 먼저 하는 곳은 직원 쪽이다. 알아 볼 만큼 알아봤으니 가격부터 제시하라고 하자 42만1,500원을 부른다. 휴대폰과 부대 기기를 포함한 가격이다. 괜찮은 조건이다 싶어 계약 절차를 밟는 순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서명을 하라고 내민 계약서에 적힌 금액은 51만1,500원.

“출고가 이하로는 팔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란다. 대신 차액은 1개월 뒤쯤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겠다고 한다. 계산 방식도 그리 단순치 않다. 선납금이란 명목으로 3만원을 별도로 내야 하고, 할부 보험금도 휴대폰과 부대 기기 각각 1만원씩 내야 한단다.

그냥 일시불로 내겠다고 했더니 “본사에서 할부 계약만을 한다”며 일축해 버린다. 부가 서비스 요금제 역시 9,000원짜리와 2만원짜리 두 가지가 있지만 처음 2개월간은 무조건 2만원짜리를 이용해야 한단다.

항의를 하자 “그럼 2만2,000원은 환불해 주겠다”는 답변이다. 복잡한 계산 끝에 결국 나중에 환불해 주겠다고 하는 금액은 6만원 가량. 모르니 그저 속고 계약하는 느낌이다.

휴대폰 보조금 정책이 표류하면서 시중에는 편법 판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출고가 이하 판매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휴대폰 사업자와 대리점들은 교묘한 방식을 통해 단속을 요리조리 피해 나가고 있다.

소비자들이 득을 보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모르면 당하기 십상이고, 저렴하다 싶지만 업계의 얄팍한 상술에 결국은 피해를 보는 것이 태반이다. 휴대폰 3,300만대 시대, 휴대폰 강국의 자화상이다.


장려금이란 이름의 보조금

이동통신 대리점이나 판매점들이 출고가 이하에 휴대폰을 판매할 수 있는 것은 넓은 의미의 보조금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보조금은 전혀 없다. 클린 마케팅을 실시하고 있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이는 좁은 의미의 보조금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휴대폰 유통 과정을 살펴보자. 휴대폰 유통은 제조업체 →사업자 →대리점(1차) →판매점(2차)의 과정을 거친다.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사업자는 제조업체에서 사들인 가격으로 그대로 휴대폰을 대리점에 넘긴다. 그래서 이 가격이 출고가가 된다. 대리점은 마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출고가 이상으로 판매를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고가 이하 판매’가 가능한 것은 대리점들이 판매 수수료나 각종 장려금을 사업자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휴대폰 1대를 판매했을 경우 통상 해당 고객이 사용한 이용 요금의 6~8%가 대리점 몫이다. 판매 수수료 명목이다. 대리점측은 이런 수수료를 현재 가치로 환산해 고객들에게 할인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장려금은 명칭만 다를 뿐 사실상 보조금이나 다름 없다. 사업자들은 특정 휴대폰을 집중 판매하고자 할 때, 혹은 특정 서비스 이용을 장려하고자 할 때 장려금이라는 이름으로 대리점에 대가를 지급한다. 판매 대수에 따라 장려금이 지급되는 경우도 흔하다.

SK텔레콤 한 대리점 관계자는 “상황에 따라서 장려금 유형이 자주 바뀐다”며 “사업자측으로부터 장려금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 무리하게 할인을 해서라도 판매를 늘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대리점으로부터 판매를 위탁 받은 판매점들 역시 대리점들로부터 이런 ‘광의의 보조금’을 지급 받기 때문에 고객들과 흥정을 벌일 수 있다. 심지어 서울 천호동의 한 매장은 이런 지원금으로 신규 가입자에게 시가로 30만~40만원을 호가하는 충전식 스쿠터까지 경품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불투명한 유통 과정 탓에 (좁은 의미의) 보조금이 끼여들 여지도 적지 않다. LG텔레콤 관계자는 “실제 대리점에 출고가 이하로 제품을 넘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뛰는 정통부, 나는 대리점

대리점이나 판매점측이 정부의 단속을 피해 출고가 이하로 판매하는 방식은 ‘실판매액 따로, 계약 따로’. 계약서에는 버젓이 출고가 이상으로 계약이 체결된 것처럼 작성한 뒤 할인해 준 금액 만큼을 고객들에게 별도로 되돌려 준다. 뒷거래이거나 혹은 이중 계약 방식인 셈이다. 휴대폰을 사가는 고객들에게는 이런 주의 사항을 반드시 얘기해준다.

“혹시 정통부나 사업자 측에서 연락이 오면 계약서 금액대로 구입했다고 꼭 얘기하세요.” 한 판매점 직원은 “보조금 금지 이후 판매량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에 경쟁이 워낙 심해져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쯤 되니 정통부의 단속도 날로 강화되고 있다. 최근엔 용산 전자상가, 테크노마트 등을 돌아 다니는 아르바이트생까지 동원하고 나섰다. 아르바이트생들이 매장에서 휴대폰을 출고가 이하로 실제 구매한 뒤 바로 다음날 해지토록 하고 있다. 여기서 적발이 되면 사업자측이나 대리점, 판매점에 영업 정지 혹은 과징금 등의 제재를 가한다. 이른바 암행 감찰이다.

사업자측은 대리점이나 판매점측에 출고가 이하 판매를 자제시키고 있다지만 사실 말 뿐이다.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6층 이동통신 매장에는 ‘정통부 아르바이트생 출고가 이하 실구매시 형사 고발’ 등의 경고문이 곳곳에 나붙어 있다.

‘뭐 낀 놈이 성을 낸다’고 아주 당당하다. N매장 직원 김모씨는 “암행 감찰을 통해 휴대폰을 실구매한 뒤 바로 다음날 해지하는 것은 영업 방해에 해당된다고 들었다”며 “상우회 차원에서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출고가보다 낮으면 뭘 해!

정통부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그렇게 아등바등 출고가 이하 판매에 나서면서도 한편으로는 얄팍한 상술이 극성을 부린다. 대표적인 것이 할부 구입 강요다. 6~12개월 할부가 아니면 계약이 불가능하다고 잡아 떼는 곳이 적지 않다. 1~2개월 만에 계약을 중도 해지하거나 대리점을 이전하는 고객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다.

한 대리점 사장은 “할부 계약시 본사에서 지급되는 장려금이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현금 구입가가 할부 구입가보다 비싼 기현상도 종종 발생한다. 어차피 무이자 할부이니 고객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이야 없다지만, 장기 사용을 강요받는 데다 1만원 가량의 할부 보험료까지 강제로 떠안아야 하는 것은 횡포에 다름 없다.

요금제를 강요받기도 일쑤다. 최초 계약시에는 일반 요금제보다 비싼 특별 요금제를 2~3개월간 의무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버젓이 거짓말을 한다. 물론 특별 요금제 가입 고객이 늘어날수록 장려금이 늘어나는 때문이다.

가격 흥정시에는 일언반구도 없던 추가 요금을 떠안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휴대폰 요금에는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은 선납금이라는 명목의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관행은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쯤이나 슬쩍 얹어서 받는 선납금은 통상 3만원에서 4만원 가량. 이 돈은 순전히 대리점이나 판매점 몫이다.

최근 신규로 휴대폰을 구입한 정상훈(32)씨는 “가격 체계가 투명하지 못해 어딘지 속고 휴대폰을 구입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특히 가격 하나 하나를 결정할 때마다 직원들끼리 속닥속닥하며 무슨 모의를 하는 것 같아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6/25 11:31


이영태 ytlee@hk.co.kr